오승은 제주대 행정학과 교수·논설위원

어느 할아버지가 선풍기 바람에 종이조각을 날린다. 가장 멀리 날아간 쪽지를 펴들고 적힌 이름을 확인한 이후 과장으로 호명한다. 개그콘서트의 한 장면 같은 이 우스꽝스러운 선발방식은 일본의 미라이공업에서 일어나는 실제상황으로, 이 회사가 택하고 있는 독특한 승진 방식이다. "그렇게 해도 괜찮겠습니까"라는 취재기자의 질문에 사장은 "누구나 맡기면 할 수 있다"고 확신에 찬 어조로 답한다. 독자들은 아마 저런 '괴짜사장'이 경영한다니 '콩가루 회사'일 것이라고 혀를 찰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회사는 창업 60년 동안 한 번도 적자를 낸 적이 없으며, 매년 경영수익률이 15%(동종업계 평균은 3% 정도라고 한다)에 달하는 '알짜' 중견기업이다.
 
민주주의의 기원이 됐던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는 입법, 사법, 행정기관의 대표를 제비뽑기를 통해 추첨제로 결정했다.(아테네 행정부는 700명 가운데 600명 정도를 추첨방식으로 뽑았고, 시민의 대표 기구인 평의회 위원 500명도 추첨으로 선발했으며 사법부인 헬리아스타이의 배심원 6000명도 추첨으로 뽑았다) 물론 선거로 대표자를 선출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추첨제가 일반적이어서 30세 이상의 시민은 누구나 대상이 됐다.
 
어느 사이엔가 우리는 엘리트 중심적 사고를 매우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복잡하고 다원적인 현대사회에서 대의 민주주의가 필수불가결하며, 특히나 정치적 행위를 하는 사람은 뭔가 보통사람과 구별되는 능력자로 생각하게 된 듯하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 불특정 다수 보통사람들의 뜻에 따르는 것이라고 볼 때, 우리 모두는 '능력자'인 것이다.
 
행정이 추구해야 할 가치는 크게 능률성과 민주성으로 대별될 수 있다. 
 
능률성이란 최소한의 예산으로 최대 서비스를 생산하는 관리운영상의 원칙이다. 민주성은 행정의 목표설정과 집행과정에서 주민의 뜻을 최대한 반영해야 한다는 주민주권의 의미다. 
 
관리운영상의 원칙으로 보자면 경영원리에 가깝고, 민주성으로 보자면 정치원리에 가깝다. 행정이론은 사실상 이 두 가지 원칙의 조합선상에 존재한다.
 
신자유주의의 대두와 함께 우리 생활 속에 시장주의가 깊숙이 침투하고, 경기침체로 인한 국가동원력의 한계를 경험하면서 최근 행정에서 민주성보다 능률성이 강조되고, 과정보다 성과를 중시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물론 베버가 이상형으로 삼았던 능률적인 관료제는 국가와 사회에 미덕이다. 그러나 그것이 '누굴 위한 능률인가'에 답하지 못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특별자치도가 출범한 지 어언 8년이 지났다. 우리나라 유일의 단층제 자치계층을 지닌 지역으로 출범하게 된 논리 역시 능률성이었다. 하지만 시·군통합과 함께 기초자치단체가 폐지됨으로써 자치의 기본이념인 풀뿌리 민주주의를 위한 제도적 장치는 사라졌다. 지방자치이념의 실현에 있어 최대 위기에 봉착한 상황이다.
 
자치와 분권이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라면 대안을 강구해야만 할 것이며, 기초자치단체가 폐지된 현재 상황에서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주민자치위원회의 강화이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형식적 위원회의 운영은 대안이 될 수 없으며, 위원회의 구성방식을 추첨제로 하고 위원의 수를 대폭 늘리며, 숙의민주주의 방식을 도입하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루소는 "국민들은 선거가 끝나는 순간 다시 노예가 되고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고 말했다. 기초의회가 없는 지금이 오히려 주민이 주인되는 '동네자치' 실현의 기회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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