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12월에, 잊고 있었는데 해태동산에 성탄트리가 세워지고 불을 밝혔다. 예수님은 왜 추운 겨울에 그것도 일 년을 마감하는 12월 말에 오셨을까. 기독교에서는 인류의 죄의 짐을 대신 지러 온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그 타이밍을 생의 결산에 포커스를 맞춘 게 아닐까. 밤하늘에 아름답게 빛의 수를 놓는 성탄트리를 바라보면서 마음은 돌을 지고 간다.

'네 방실거림으로/ 꽃들이 피어나고// 네 옹알이로/ 세월의 간다' <나의 시 '아가야'부분>

아가의 옹알이로 세월이 갔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12월의 태양의 눈빛은 얼음처럼 엄정하고, 지금은 창문을 닫고 앉아 조용히 내속으로 침잠할 때, 나를 저만치 세워놓고 찬찬히 들여다볼 때이다. 

우리는 4월 16일을 잊을 수 없다. 잊지 말아야 한다. "엄마, 사랑해!" 30m 물속으로 가라앉는 세월호에서 보낸 최후의 메시지에 꼭 죽을 것만 같은 먹먹함을 '나는 죄인이 되어/ 내 사랑은 거짓이 되니// 이제 영영/ 어디 가서 사랑을 말할 수 있으랴.'라는 싯구로 절통한 마음을 토로한 바 있다. 아직도 나는 그 먹먹함으로 가위 눌릴 때가 있다. 세월호 침몰로 304명의 귀한 생명을 잃었다. 희생자 대부분이 피어보지 못한 어린 학생들이어서 더욱 마음이 아프다. 재난은 예고 없이 언제 어느 곳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 그럼에도 가슴을 치는 것은 불가항력적인 재난이 아니라 잔잔한 바다 위에서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인재였다는 데 있다. 이로 하여 250여일을 온 국민이 망연자실 무기력증의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호는 사회를 움직이는 모든 시스템이 고장 난 총체적 난국인 것 같다. 그 원인은 경제우선 개발우선의 논리로 자연의 섭리, 곧 신의 섭리를 저버린 데 있지 않을까. 유물적 사고는 도덕적 헤이를 불러오고, 하늘을 바라보지 못하고 땅만을 바라보는 눈들은 다만 욕망추구의 맹목적인 눈으로 퇴화하고 만 것은 아닐까. 그러지 않고서야 만연한 생명경시풍조와 물질만능주의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다시 12월에, '욕심을 버리자고 다잡은 마음이었는데/ 손 하나는 펼치면서 뒤에 감춘 손은/ 꼭 쥐고 있는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오광수의 '12월의 독백'이 가슴을 친다.

나에게 삶은 무엇이며, 지금 나의  삶의 모습은 어떠한가라는 명제 앞에서 나는 방향도 없이 마치 죽은 붕어처럼, 영혼을 빼어버린 좀비처럼 떠 흐르는 게 아닌지 자괴감을 금할 수 없다. 지금 자연은 온 산과 들, 나무와 풀들도 눈밭에 맨몸으로 서 있다. 자연은 화려했던 봄의 치장도, 치열했던 여름의 삶도 가을의 서늘한 눈빛으로 한 해의 삶을 성찰하고 조용히 묵상하고 있다, 아니 치열하게 명상하고 있다. 나무는 나에게 은밀한 언어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 속삭이고 있다.

이 겨울에 예수님은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오셨다.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시면서 그는 뭇 생명을 살리려고 스스로 목숨을 내어주셨다. 이 땅의 소외되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그의 짧은 생애를 사랑의 불꽃으로 태웠다.  

필자는 생명존중사회, 사람이 중심인 사회를 목말라하면서 12월의 시 몇 구절을 소개하고자한다. 

아무리 돌아보아도 나/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진 못하였으니// 이른 아침 마당을 쓸 듯이/ 아픈 싸리비 자욱을 남겨야 하리 <허영자의 '섣달그믐이 가기 전에' 부분> 

제 얼굴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는/ 지천명으로 가는 마지막 한 달은/ 숨이 찹니다// 질기게도 허욕을 쫓는 어리석은 나를/ 묵묵히 지켜보아주는 굵은 나무들에게/올해 마지막 반성문을 써 봅니다. <목필균의 '12월의 기도'부분>

또 한 해가 가버린다고/ 한탄하며 우울해하기보다는/ 아직 남아 있는 시간들을/ 고마워하는 마음을 지니게 해주십시오. <이해인 '12월의 엽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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