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필 제주국제대학교 부속 지역아동센터지원단장·논설위원

   
 
     
 
1월(January)은 로마 신화에 나오는 야누스(Janus)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야누스는 두개의 얼굴을 갖고 있어서 흔히 겉과 속이 다른 사람, 인간의 이중성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는데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한다. 야누스는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문을 지키는 신이고 두개의 얼굴은 과거와 미래를 바라보는 얼굴이라 한다. 

우리의 미래를 바라보는 야누스가 미소를 띠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기는 어렵다. 우리 사회의 양극화 현상이 만든 세상을 보면 그렇다.

아이들이 자라는 토양조차 둘로 나누어 놨다. 한 쪽의 토양은 물과 영양이 넘쳐 썩어가고 다른 한 쪽의 토양은 메마르다 못해 쩍쩍 갈라진다.

주체할 수 없는 풍요가 있는가 하면, 의식주도 해결하지 못하는 절대 빈곤이 공존한다.

부모의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에 따라 아이들이 자라는 환경은 판이하다. 의식주는 물론 교육, 건강, 문화 등 모든 조건이 차별적이다. 교육의 질도 다르다. 낮은 교육의 질로는 높은 스펙을 갖추기 어렵다. 좋은 대학과 직업에 접근할 기회는 박탈당하고 성공에선 배재된다. 개천에서 더 이상 용이 나올 수 없는 사회구조다.

결국 빈곤가정 아이들의 삶은 부모를 닮아가고 다시 빈곤한 부모가 되어 똑같은 방식으로 아이를 키우며 빈곤은 대물림된다.

이렇게 빈곤이 대물림 되는 동안, 우리사회 인구고령화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부양해야 할 노인은 늘고 생산인구는 감소하지만 모두가 세금을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통계청 등의 조사결과를 보면 아동빈곤율은 10% 안팎이다.

지금 이 아이들의 복지 욕구에 적절히 대처하지 않으면 미래사회 생산인구가 이들의 삶의 무게도 감수해야 한다. 현재는 생산인구 7명이 노인 1명을 부양하지만 2030년에는 2.7명이 1명을 부양해야 한다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아이들이 짊어지기 버거운 미래사회다.

지금 아이들에게 투자 한다면 그 이익은 빈곤층뿐 아니라 세금을 내는 중산층과 부유층을 포함해 모든 사회가 광범위하게 공유할 수 있다.

미국에서 행해진 장기적인 종단연구들에서 아동 조기 개입 프로그램의 사회적 편익이 투입 대비 2배에서 17배까지 이른다는 연구결과는 아동기 투자의 사회적 중요성을 잘 말해준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아이들이 중요하다고는 하면서 국가예산은 1%가량에 머무른다. 

OECD 국가들이 아이들에게 투자하는 예산은 GDP 대비 평균 약 2.3%며, 프랑스는 3.5%를 투자한다. 더구나 복지의 흐름이 선별적 복지에서 보편적 복지로 흐르면서 예산과 관심은 무상보육과 무상급식 등으로 집중되고 빈곤한 아이들의 복지는 상대적으로 소외되고 있다.

부모의 고급승용차에 올라타서 달리는 아이와 찢어진 운동화를 신고 달리는 아이의 경쟁은 공정한 경쟁이라 할 수 없다.

아이들의 불평등한 출발선을 사회가 주목하고 삶의 조건을 동등하게 맞춰줘야 한다.

빈곤아동의 복지·교육·문화 등의 소외와 차별로 인한 결핍을 채워줘야 한다. 그래야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 사회양극화의 입구를 막을 수 있다. 또한 다가오는 고령화 사회의 재앙을 막을 수 있다. 지금 어른들이 할 일이고 정치가 할 일이다.

아이들이 '미래다' '꿈이다' '희망이다'라고 말한다. 맞다. 미래를 결정하는 가장 강력한 변수는 아이들이다. 아이들을 어떻게 키우느냐에 따라 우리사회의 미래는 달라진다.

우리의 미래를 바라보는 야누스의 표정이 미소 띤 얼굴이 될 수도, 분노와 절망의 얼굴이 될 수도 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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