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문철 전 제주도교육청 교육정책국장·논설위원

   
 
     
 
일찍부터 사람들이 세월을 활시위를 떠난 화살에 비유하여 마치 '쏜살같이 빠르다'고 하더니, 미상불(未嘗不) 새해 들어 어느새 세 번째로 맞이하는 월요일 아침이다. 필자로선 새해 첫 칼럼이기에, 변변찮은 글이나마 늘 사랑으로 대해주신 독자 분들께 새해 벽두부터 복잡하고 난해한 사회적 이슈들로 씨름하기보다 덕담으로 세알(歲謁)을 드리는 게 도리다 싶어 주제를 이렇게 잡았다.

이 지구상에 무려 70억에 이르는 사람들이 산다지만, 저들이 비록 인종과 종교, 역사와 언어 등은 달라도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와 이상은 아마도 '행복'에 있지 않을까 한다.

사실 우리네 인생이란 이 행복이라는 신기루(蜃氣樓)를 찾아 나선 여정에 다름 아니리라. 만약 이러한 가설(假說)이 성립한다면, 과연 행복은 어디에서 오며 또 무엇으로 그것을 확인해 볼 수 있을지를 생각해 봐야한다. 이러한 물음에 필자는 늘 '자아실현(自我實現)'이라는 단어로 대답에 갈음한다. 그렇다면 자신이 행복감을 느낄 정도로 자아가 실현된 상태는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그것은 이를테면 원하는 자리나 그런 상태에 이르거나 갖고 싶은 것을 가진 것 등으로 요약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갖고 싶은 것 다 갖고, 되고 싶은 것 다 된다면 두 말 할 것 없이 행복한 삶이리라. 그렇지만 이렇듯 아리송한 무지개를 마냥 따라나서기엔 우린 이미 너무 철이 들어버렸다. 또한 그처럼 생각 없이 배만 부른 돼지로 살아갈 순 없다. 그런데 앞이 막혔다고 주저앉거나 그냥 즐기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고, 또 그렇다고 마냥 부딪히기엔 힘의 한계가 엄존한다. 이 수렁에서 내가 헤어날 길은 정녕 없는가! 오!, 새벽닭 우는 소리와 더불어 저 먼 동편 하늘에서 한줄기 빛이 내게로 걸어 나옴을 느낀다.

그 빛은 마침내 바로 내 마음 밭에 내려앉았다. 새해엔 여기에다 두 개의 작은 씨앗을 심고 정성껏 가꿔보리라. 하나는 '작은 소망'이라는 씨앗이다. 우리가 행복을 찾아 나설 때 너무 큰 그림만을 그리지 말자. 일찍이 벤자민 프랭클린(F. Benjamin 1790)은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선 '소유(所有)'를 늘이거나 '욕망'을 줄이는 두 갈레의 길이 있다며 선택은 우리의 몫임을 압박해 온다. 그렇다. 우리가 진정 행복해지기를 바란다면 욕망의 크기를 줄여 내 몸에 알맞도록 조촐하고 소박하게 가꿔나갈 일이다.

또 다른 하나는 '자족과 감사'라는 씨앗이다. 본디 인간의 욕망은 가히 하늘에 닿을 듯이 끝이 없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바벨탑 사건(Tower of Babel)'이 이를 웅변으로 증명해 주고 있지 않은가!. 그러한 삶엔 만족이 없고, 만족이 없으니 기쁨과 감사가 따를 리 없다. 성서는 우리에게 자신은 삶의 어떤 상황에서든지 '자족(自足)하는 비결'을 배웠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전해준다. 가진 것의 대소다과(大小多寡)를 무론(毋論)하고 언제나 만족해하고 감사하는 삶일진대 행복은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열매에 불과하다.

'벵갈의  성자'  라마크리슈나(Ramakrishna)의 말처럼, 사실 우리가 행복하지 않다면 우리가 가진 집과 돈과 명예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으며, 이미 행복하다면 그런 것들이 또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가히 천문학적인 수준의 재산을 갖고도 자살하는 비운의 재벌이 있는가 하면, 불과 기만원의 일당을 손에 쥐고도 마냥 기뻐서 막걸리 한 사발에 콧노래를 부르며 단칸셋방을 찾아드는 가난한 노동자도 있으니, 정녕 행복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행복의 비결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보다 내가 하는 일을 좋아하는 데 있음(J.B.Bury)을 깨달아, 올 한해도 묵묵히 내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저마다의 마음 밭에 행복이 주렁주렁 영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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