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태림 수필가·논설위원

   
 
     
 
너의 편지를 읽고는 멍하니 한동안 먼 산만을 바라보았다. 세월이 사람을 참 많이도 변하게 하는구나 하면서 말이다. 그 사이 20년간, 도대체 어떤 풍상이 너에게 휘몰아쳤기에 그렇게도 낙천적이고 적극적이었던 네가 그처럼 소극적이고 비관적으로 변해버렸는지 이해할 수가 없구나. 총명하고 지혜롭던 네가 왜 그렇게 무능하고 편협해졌는지, 어째서 그렇게 극단적으로 경도(傾倒)되었는지 도저히 알 길이 없구나.

k야. 이 지구상의 수십억 사람들의 삶은 다 제각각 다름을 너는 잘 알고 있지 않느냐.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다 평범하고 모두들 행복해 보여도 그들의 마음속에도 너와 다르지 않은 번민과 괴로움과 불행과 슬픔을 모두들 지니고 살아가고 있단다. 우리의 삶이란 항상 행복하지만도 않고, 그렇다고 언제나 불행하지만도 않은, 행복과 불행이 날줄과 씨줄이 되어 서로 옷감처럼 짜여 있음을 너는 잘 알고 있지 않느냐.

k야. 이 세상은 돈이 많고 적음이 행복의 척도는 아니란다. 거짓으로 들릴는지 모르겠지만 네가 그렇게 원하는 돈이 오히려 많아서 힘들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믿겠느냐. 그들의 생활은 호사스럽다지만, 재산을 지키기에 항상 노심초사로 좌불안석하고, 서로 더 갖겠다는 재산다툼으로 형제자매들 간에 서로 고소고발로 원수가 되어 재판장을 들락거리는 볼썽사나움을 보고 있지 않느냐. 재산 때문에 생겨나는 살인사건이 하루인들 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하지 않은 날이 있더냐. 그래서 불행한 억만장자는 오히려 가난한 거지의 행복을 부러워한다는 말이 생긴 것이다.
k야. 언제나 위만 쳐다보지 말라. 성공한 사람들만 바라보며 자신과 비교하지 마라.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면 가랑이가 찢어진다'거나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한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너를 뱁새나 송충이로 보아서 헛된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말도 아니다. 왜 이런 말이 생겨났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보아라. 속담이나 경구는 생활의 바탕이요 진리다. 너는 간혹 너의 직분을 잊고 허상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음을 알아야한다.

위를 쳐다볼수록 자신만 초라해진다. 스스로 자존심만 망가질 뿐이다. 너 스스로 무능하다고 여겨 너의 총명함과 지혜로움이 묻힐까 두렵다. 반대로 아래를 내려다보라. 너의 삶이 그런대로 실패하지 않았음을 알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렵게 삶을 이어가고 있는지를 잘 살펴보아라.

새벽녘 찬 공기를 헤치며 일터를 찾는 막노동꾼의 굽은 어깨, 한 끼의 식사를 때우기 위해 무료 급식소 앞에 줄을 선 노인네들의 기죽은 모습, 아직도 백수인 채로 주변의 눈길을 피해 머리를 숙이고 골목길로 돌아드는 젊은이들, 수많은 부채에 눌려 계속된 독촉에 한시의 편함을 누리지 못하는 불안한 채무자들, 이처럼 삶의 기반을 잃어버렸거나 아직 마련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서 그래도 살아보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는가. 여기에 비하면 너의 상황은 훨씬 낙관적이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k야. 네가 잡으려는 행복은 너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내가 불행하다고 느끼면 더욱 행복은 멀어지는 것이고,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면 그 행복은 살며시 네 곁에 다가서는 것이다. 행복은 생각하기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매우 주관적인 것이다. 성공한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자신을 자탄하거나 혐오하지 말고, 자네보다 불행한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자신의 자존감을 높이고 위무하라. 사라지지 않는 진정한 행복은 너 자신과의 끝없는 대화에서만 얻을 수 있는 너 자신에 대한 사랑과 너그러움이라고 본다.

k야.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아직까지 너의 하늘은 무너지지 않았다. 아니,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솟아날 구멍은 너무도 많다. 절대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마라. 나는 이제 행복해질 것이라고 크게 외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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