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두 제주언론인클럽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수석을 취미로 하고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의 제자중의 한 사람인 단계 김영면이 쓴「단계의 예석기」를 보면 추사는 가장 아끼는 수석 세개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의 버섯이 세개 달린 것처럼 생긴 수석이 특이했다'고 쓰고 있다. 
 
제자인 단계는 이 수석을 갖고 싶어 5년 동안 스승에게 간청했으나 주질 않았다.  이를 보다 못한 동생인 상희가 추사의 관심 밖에 있는 수석 하나를 주었다. 
 
단계는 이를 고맙게 받고 이 수석에 대해 시를 썼는데, 단계가 소장하고 있는 수석 11개에 대해 쓴 시를 모은 것이 「단계의 예석기」이다. 추사는 또한 '괴석전'이란 시를 남겼다.
 
돌밭 나즈막히 운무깔려 돌들 스쳐가니 /덩어리 마다 주름잡히고 구명뚤림 영롱도 해라/다른 돌밭 돌들과 천만가지 특이한 모양이지만/그중에서 딱 한덩어리 괴석만 골라보려네.
 
추사가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많은 제자들이 제주에 와서 서예와 서화를 배우고 갔다. 그 중에 소치는 제주에 세번 왔는데, 오면 두달 가까이 지내면서 가르침을 받았다. 
 
소치가 제주에서 그린 괴석도는 양중해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추사가 수석을 취미로 했다는 기록이나 '괴석도' 같은 시는 앞으로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수석을 이야기하려면 추사보다 앞서 살았던 이형상(1653~1733)을 빼놓을 수 없다. 제주목사를 지냈던 이형상의 「언행록」에는 높이 16㎝ 길이와 폭이 10㎝의 자그마한 수석 '천봉만애'에 대한 글이 실려있다.
 
"책상 위에 작은 괴석 하나를 두고 감상한다. 골짜기 돌 틈에 노송의 씨를 키우고 푸른 이끼를 덮어 계곡을 이루었다. 항상 이르기를 책상에서 학문에 열중하다가 잠시 눈을 돌려보면 한가로이 山水의 아름다운 정취를 만끽하게 되노라"며 전통적인 산수석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형상의 9대 손의 집안에서는 천봉만애 등 수석들을 가보로 소장하고 있다. 
 
이형상은 제주목사(1702년 6월~1703년 6월)로 재직하면서 수석뿐만 아니라 '탐라순력도'를 비롯해 '남한박물' 등 제주에 관한 역사적 기록을 많이 남겼다. 
 
조선조 제주목사 280여명 중에 가장 기억할만한  분이라 하겠다.
 
300여년 전 제주에 살았던 김정희, 이형상 두분의 수석이야기를 간략하게 되돌아 보았다. 아쉬운 것은 이후의 수석에 관한 기록은 아직 찾지 못했다는 점이다. 혹시 기록을 소장하고 계신분이 있으시면 정보를 교환했으면 좋겠다. 
 
끊어진 제주수석사를 바로잡기 위해서이다. 맥이 끊겼던 제주수석사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지난 1969년 4월25일에 창립한 '영주수석회'이다. 
 
이 수석회는 7명으로 출발해서 1970년 1회 전시를 시작해서 지난해까지 45년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수석전을 가진 전국 최초의 수석회가 되었다. 영주수석회가 소장하고 있는 방명록을 보았다. 서울, 부산, 광주 등 전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수석전을 보러왔던 기록이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법정스님(1932~2010)도 제주시내 산호다실에서 열린 제9회 수석전에 와서 방명록에 '축전 78가을 법정' 이란 글을 남겼다. 즐기되 소유하지 않았던 법정스님의 무소유가 문득 그립다. 이후에 제주에는 25여개의 수석회가 생겨서 수석에 대한 열기가 뜨거웠다.
 
더욱이 여성들만의 수석회인 '삼다수석회'와 '연미석우회'는 수석에 대한 여성들의 관심을 크게 높였으나 지금은 모두 해체되고 '영주수석회'와 '제주소석회' 등 두 세개만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전통문화는 고유한 것이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갈고 닦으며 후세에 서도 계속 이어져야 한다. 수석문화 또한 그 가운데 하나다.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