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우 노하우석세스시스템 대표·논설위원

조선시대 정조의 시문집 '홍재전서 (弘齋全書)'는 정조의 사상에 관해서나 당시의 사상풍토, 사회의 전반적인 이해관계와 소통능력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자료다.
 
1783년 경기, 호남 동부 지역에 기근이 들자 정조는 침전에 '상황판'을 걸어 놓았다. 정조가 침실을 '재난 컨트롤타워'로 삼아 진두지휘한 까닭은 명쾌했다.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으니 곤경에 빠진 백성을 편안하게 만들어야 과인이 마음도 편안해 진다'는 것이었다. 작은 일에도 정성을 다했다는 기록은 상황판을 통해 충분히 짐작이 간다. 침실 벽에 재해를 입은 지역을 세 등급으로 나누어 고을의 수령이름을 써놓고, 세금을 감면하거나 구휼을 마칠 때마다 그 위에 기록했다. 
 
230여년이 지난 지금,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첫 발병자가 나오고 한동안 보여준 정부와 청와대의 대응이 가슴시리다. 메르스 사태와 관련해 꾸려진 각 현장 조직의 역할과 권한 및 책임의 경계는 여전히 뚜렷하지 않고 일관성을 갖추지도 못했다는 게 전문가들과 국민들의 시각이다.
 
청와대는 지난 4일 열감지 카메라를 설치해 한국-세네갈 정상회담 관련 출입자들의 체온을 검사했고, 귀 체온계까지 이용해 관련자들을 꼼꼼히 체크했다. 논란이 일자 청와대 열감지기 설치와 관련 "신종플루가 있었을 때 확립된 경호실 경호 매뉴얼에 따라 단계별로 정상적으로 잘 대응한 것"이라며 "한시적으로 사용했지만 현재는 운용하고 있지 않다"고 해명했다. 또 "우리가 메르스에 안 걸리려고 한 게 아니라 외국 정상이 왔을 때 그 분들의 불안 등을 해소시키기 위해 한시적으로 운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꼼꼼히 체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변명할 문제의 소지가 있는 것은 아니다. 국격 운운하는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의 안전을 책임지고 외국정상에 대한 기본적인 조치일 것이다. 하지만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는 국민들을 위해서는 무엇을 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230년 전 정조가 보여준 발 빠른 대처방안과 재난 대처법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불과 10년전 대한민국은 사스 예방 벤치마킹 대상국가에서 2015년 6월 메르스 방역실패로 방역후진국이 됐다. 나라의 기본을 망가뜨렸으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하는데 책임질 사람이 없다. 원망할 대상이 없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나라는 누구의 나라인가.
 
국가의 기본이 왜 이렇게 무너졌는지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하는 것은 광우병 파동처럼, 세월호 사건처럼, 우리 국민은 쉽게 잊어버린다는 근성을 위정자들이 잘  파악하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가만히 있어라'는 말에 가만히 있다가 수장된 어린 학생들을 생각해 보라. 통렬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
 
진정성이 결여된 소통으로 가득 찬 정보사회는 '존경'과 '배려'를 없애 버린다. 실제로 대한민국에 더 이상 존경심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통령도 더 이상 존경의 대상이 아니다. 어른들도 정치인도, 도정을 책임지는 도지사도, 교수와 교사도, 종교지도자들도 과거에 비해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다. 
 
존경은 공공성의 초석을 이루는 핵심인데, 이렇게 존경심이 사라지면 공공성도 무너진다. 공공의 리더십이 절실히 요구되는 지금, 국민의 의혹을 풀어주고 방향을 제시해 줄 지도자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선조 같은 졸장 밑에도 서애 유성룡이라는 명장이 있었고, 나라가 그를 버려도 국구의 일념으로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도 있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지도자는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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