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주 제주에코푸드 대표·논설위원
최근 서귀포에서 강정동 '대궐터' 유적 학술 심포지엄이 열렸다. 구전으로 전해 오던 속칭 가래촌 '장구왓'을 발굴조사했다. 건물지와 배수로, 기와의 와적시설과 불에 탄 흙이 쌓여 있는 흔적이 확인됐다. 제한된 구역과 유물로 대궐터로 추정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출토 유물에 대한 방사선 동위원소 측정으로 연대가 14세기 전후 즉, 고려말 조선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또한 주춧돌은 법화사지에서 수습된 그것과 유사해 같은 시기의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강정동 대궐터의 유적은 13~14세기 몽골 원(元)제국의 탐라 통치와 연관된 시대적 증거물로 그 가능성이 높다.
특히 14세기 말 몽골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찰, 분묘 및 거주유적으로 화순동 '양왕자 터', 상예동 '왕자골'과 '현청터', 하원동 '왕자묘'와 '법화사지', 강정동 '대궐터'와 염돈마을 '왕자구지' 등 여러 곳이 거론돼 왔다. 이 권역은 옛 13세기 충렬왕 당시 서아막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산방현에서 예래현에 이르는 곳에 분포한다. 몽골과 탐라가 함께 한 문화벨트이며 남아 있는 역사적 흔적인 셈이다.
몽골제국 말기의 위기상황 하에서이기는 하지만 원나라의 탐라로 천도하는 시도마저도 있었다. 토곤테무르(순제)가 '탐라드림'이 실현되기도 전, 명을 건국하는 주원장(朱元璋)에게 밀려 몽골초원의 '북원'(北元)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초원에서 북원은 순제의 아들 두 형제가 차례로 황제의 지위를 이어 갔다.
이들은 우리가 익히 아는 고려 여인 기황후의 자식이며 혈통이다. 이들이 사망하자 북원에서 쿠빌라이 칸의 혈통은 사실상 끝이 났다. 하지만 그 혈통이 제주에서 연연히 이어져 오는 사실은 세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다.
주원장은 징키즈칸 황금씨족을 3차에 걸쳐 제주로 보냈다. 주원장은 양왕자 바이바이를 태자로 책봉해 그의 아들을 포함한 가족을 안치시킨 것이다. 그가 전략적으로 원제국의 계승은 북원이 아닌 제주를 진정한 원나라 '남원'(南元)으로 삼은 터이다.
이어 5년 후 추운 겨울 징키즈칸의 황금씨족(키야드 보르드지드) 80호가 무리를 지어 제주로 들어온다. 이들을 살집으로 85채를 미리 마련해 뒀다. 호당 4명씩 계산하면 320명이 넘는 대단위 이주이다.
마지막으로 2년 후 1389년 투항한 원조 제왕을 탐라국으로 보냈다. 전술한 화순 양왕자터에서 하원 법화사지, 강정동 대궐터로 이어지는 유적들은 쿠빌라이칸 직계 내지 징키즈칸의 혈맥들과 상당부분 연관돼 있는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동시에 탐라의 역사가 세계사속으로 편입되는 사건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 몽골과 우리가 어떤 관계를 맺어가는가이다. 지난 13세기 몽골은 우리나라를 강제로 이끌고 일본 정벌에 나섰다. 그들은 제주도를 태평양의 징검다리로 삼아 해상 무역제국을 꿈꿨다면, 21세기에 와서는 우리 정부가 이른바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꿈꾸고 있다. 여기에는 궁극적으로 북한의 공동참여를 의도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부산-북한 두만강 지역-러시아-중국-중앙아시아-유럽 간 '실크로드 익스프레스'의 실현이다.
또한 몽골은 교착상태에 빠진 남북대화의 물꼬를 트는 중재자의 역할로 기대하고 있다. 김정은이 북한 집권 후 처음 초청한 국빈이 몽골 대통령이며 사회주의 시절부터 우호국 관계를 유지해 왔다.
현실적으로 경제발전을 위해서 몽골정부도 한국을 필요로 하고 있고 한국정부도 몽골을 필요로 하고 있다. 지속적이고 깊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양국 간에 문화적 동질성이 회복돼야 한다. 제주도가 나서 몽골과 문화적 보편성과 특수성을 담보로 한 정신적 소통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주 몽골유적은 21세기 유라시아로 나아가는 한국-몽골의 보물이 되고 있다.
제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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