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익 수필가·논설위원

한국과 일본 간에 국교를 튼 지 50주년이다. 경색된 실타래를 풀기 위해 서로 많은 노력들을 기울이고 있지만 어떤 결실이 맺어질지는 의문이다. 일본의 행보가 심상치 않다. 지난 4월29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미 연방 상·하원합동회의에 참석, 세계 질서를 설파하는 자리에 섰던 게 걸린다.
 
아베는 미·일 신 밀월시대의 개막을 선포했다. 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은 '통절한 반성을 가슴에 새기며 오늘까지 걸어왔다고 과거의 잘못을 사과했다. 
 
또한 자유세계 제1, 제2 민주주의 대국을 연결하는 동맹이 이뤄졌다며 미국의 입장을 지지해 나아갈 것이라고도 했다.
 
미·일 신 동맹, 그것은 우리를 외교적으로 난처하게 할 것이다. 섬 방위 협력 증진을 미·일 간에 명기하고 있는 지금이다. 만약 섬을 놓고 충돌이 벌어진다면 우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일 수도 있다. 세계경찰을 자처하는 미·일과 새로이 대두하는 중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출구를 찾으려 안간힘 쓰는 우리의 모습이 애처롭게 다가온다.
 
문제는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에 있다. 이제 그들은 그 주변에서 벗어나 전 세계로 파병할 수 있는 길을 터, 군사대국화의 교두보를 확보한 셈이다.
 
만약 한반도에 포화 소리가 드높아지면 미군을 지원한다는 명목 하에 일본 자위대가 한반도에 진출하는 길이 열리는 건 아닐까.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이 우려스럽기만 하다. 역사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은데도 그들은 어떤 길을 걸어왔는가. 이조 선조 때, 두 번의 왜란은 민생을 도탄에 빠뜨렸다. 근세사에 들어와서도 우리나라를 비롯해 아시아 주변 국가들에 안긴 고통은 참으로 심대한 것이었다. 
 
루스 베네딕트가 쓴 「국화와 칼」이 떠오른다. 왜 일본이 자꾸만 우리를 달아오르게 할까. 계층구조에 몸이 배어 상하관계에 익숙한 그들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친 적이 있기에 우리가 자기들 발밑에 있다고 여기는 건지도 모른다. 
 
돌아오는 8월에 아베가 어떤 말을 꺼내들지 모르지만 걸핏하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지 않는가. 침략을 진출로 바꿔 침략의 역사를 부정하며 위안부 문제를 나 몰라라 한다. 2차 세계대전 A급 전범들의 위패가 안치된 신사 참배에 주저함이 없다.
 
국화라는 유연함 속에 숨겨져 있는 칼날이 날카롭다. 이제 전 세계로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됐으니 거리낄 게 무언가. 극동을 넘어 환태평양 중심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트이고 있지 않은가.
 
극우 국수주의 정치가 평화헌법에까지도 손대려 수순을 밟고 있다. 갈 때까지 가 보자는 건가. 일본의 재무장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평화헌법 제9조를 뜯어고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일본 평화헌법 제9조. 제2차 세계대전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유래했다. 
 
일본의 상징이었던 천황제를 유지하는 대신, 군대를 보유하지 않는 방향으로 서로 조율한 것이다. 그런 조항을 제9조에다 삽입한 게 평화헌법이다. 
 
평화헌법 제9조를 수호하기 위해 일본에 9조회가 결성됐다. 여기에 국제적 이목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하다. 한 발짝 더 나아가 평화헌법에 노벨평화상을 수여하자는 움직임이 요원의 불길처럼 일고 있다. 
 
파고가 높아지고 있는 동북아에 평화를 간절히 갈구하는 몸부림이 일렁이고 있다 할까. 
 
국제정세는 한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특히 동북아에서 일고 있는 풍운은 언제 어떻게 전개될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일본의 부상에 우려를 금할 수 없다.
 
평화헌법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도록 함께 힘을 보태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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