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찬국 충남대학교 교수·논설위원

민주주의, 서양철학, 올림픽 경기의 원조인 그리스가 큰 어려움을 겪으며 뉴스를 독점하고 있다. 경제학도뿐만 아니라 사회 현상을 살피는 사람들에게 지금 유럽과 그리스의 위기 사태는 다양한 시사점을 준다. 관심이나 시각에 따라 방점이 다를 수 있다. 필자에게는 이번 일이 경제적 논리보다 정치적인 고려가 우선시 되며 내려진 잘못된 결정의 대표적인 예로 보인다.

그리스의 위기의 서곡은 유럽 국가들이 약 15년 전 자국의 통화를 포기하고 유로화를 쓰면서 시작된다.

역사적으로 보면 대륙을 초토화 시킨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국가들 간 미국과 같은 연방국가 수준으로 결속하는 것이 되풀이되는 전쟁을 막고 번영을 이루는 방법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정치·경제 분야에서 협력체가 잇따라 출범했다.

이때부터 유럽 국가들 간 환율이 항상 중요한 현안이었는데 문제의 소지를 없애는 근본적 방법은 같은 화폐를 사용하는 것이다.

시행착오가 거듭되며 공동 통화 사용을 위한 준비가 계속돼 드디어 1999년부터 유로화 사용이 시작된다. 2년 후에는 독일의 마르크화, 프랑스의 프랑화와 같은 각 나라의 화폐가 새로운 유로화로 전면 대체돼 사용되며 유로존(zone)이 탄생한다.

그런데 자국 통화대신 유로를 사용하는 것은 그 나라의 통화관련 주권, 국가 단위의 통화정책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경제 어려워져 금리를 낮추고 싶어도 해당 국가는 이런 통화정책을 수행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제약 때문에 경제학자들은 출범 이전부터 유럽의 통화통합이라는 미증유의 실험이 성공하려면 여러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고 경고했다.

우선 공동통화 사용국들의 경제여건이 비슷해야 한다. 고용사정이 나쁜 곳의 근로자들이 사정이 나은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 가능해야 한다. 또 다른 나라들 간 재정 지원도 가능해야 한다. 이런 조건이 갖춰지면 침체를 겪는 나라가 경기회복을 위해 굳이 통화정책 수단에 의지할 필요가 줄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이 구비되지 않으면 통화통합의 성공이 어렵다.

출범 이후 수년이 지난 뒤 기존 유로화 사용 국가들과 여건이 많이 다른 그리스도 유로존 회원국이 됐는데 언급한 경제적 여건을 감안하면 무리한 일이었으나 정치적 고려가 우선시 된 결정이었다. 그 이후 십여 년 유로화가 국제 기축통화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하며 순항하는 듯 보였다. 경제학자들의 경고는 쓸데없는 기우로 치부됐고, 이를 무시했던 통 큰 정치 지도자들이 더 단수가 높아 보였다.

하지만 2008년 세계금융위기의 후폭풍은 이런 결정이 무모했음을 여실히 보여줬다. 유럽 경제가 어려워지자 호우에 허술한 제방 무너지듯 취약한 유로존 국가 들이 심각한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리스가 최악의 경우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재언이 필요 없게 언론 보도가 상세하다.

정치적인 고려를 우선시하는 통 큰 결정은 시간이 지나 누군가의 부담을 크게 늘리기 십상이다.

이런 시사점은 먼 곳의 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제주에서는 개발과 보존의 균형이라는 민감한 문제가 상존한다. 기념비적 업적을 남기려는 욕심은 후진국 정치 지도자들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보통 큰 사업들이 단기간에 추진되면 당장 드러나지 않는 비용이 큰 경우가 심심치 않다. 늦게 나타나는 경제적·사회적 부담을 감수해야 되는 입장에서 꼼꼼히 따져 결정을 내려야 한다. 특히 지리적으로 협소하고 갈등 수위가 높은 제주지역의 경우 숨겨진 비용이 생각보다 클 수 있음을 염두에 둬야 한다.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