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민 영국왕립건축사 논설위원

최근 한 건축가 선배로부터 건축가로서의 도덕성과 윤리성을 어긴 적이 없었는가에 대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요지는 낮은 용역비로 일을 수주해서 전체 시장을 교란시킨 적이 없는가였다. 이에 죄책감이 들면서도 억울하고 서운한 마음에 선뜻 대답하기 힘들었다. 어쩔 수 없이 했던 공공을 위한 일들, 어느 누구도 못하겠다고 했지만 누군가는 해야하기 때문에 맡았던 일들은 보통 그 용역비가 적정하지 않았다. 나름 희생을 한다고 맡아서 고생만 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내 만족일 뿐 다른 동료에게 피해를 주고 있었던 지도 모른다.
 
요즘처럼 모든 영역의 경쟁이 극심한 상황에서 직업에 대한 윤리 의식은 보이지 않는 경쟁자이자 이웃에 대한 배려라는 점에서 필수적이다. 가격 덤핑이 한 개인에 미치지 않고 그 여파가 시장 전체로 미치기 때문이다. 동네에 치킨집, 빵집이 수십개인 현실에서 나만 살겠다고 가격을 낮췄다가는 공도동망(共倒同亡)하는 사태가 벌이질 수 있다. 그렇다고 절대적인 기준을 정하는 것도 대안은 아니다. 일방적으로 정해진 가격은 결국 건강한 경쟁을 해치기 때문이다.
 
직업의 윤리는 중용을 지키는 것이고 어느 정도의 적정선을 유지하며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가치의 기준이 모호하고 애매하기 때문에 더욱 그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기준으로 직업의 도덕성과 윤리성을 평가하는 것이 과연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건축 설계비의 예를 들어 보자. 건축사법에서 정한 용역비는 주로 관에서 발주하는 일에 설계비를 책정하기 위해서 근거로 필요하지만 개인 건축물을 설계할 때도 기준이 된다. 이 기준으로 산정한 설계비가 비싸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지만 사실 1990년대 초반에 만들어졌던 내용이다. 그동안 많이 오른 직원들의 인건비와 각종 경비 등 물가가 반영되지 않은 것으로 그마저도 저렴하기를 요구하는 건축주들을 설득하는 것이 항상 어렵다. 어쨌든 아직 완공해본 경험이 없는 신인들은 어느 정도 타협해서 일을 맡기도 한다. 그러다 경험이 쌓여가면서 현실적인 한계들을 깨달아가면 적정한 설계비에 대한 기준이 생기기 마련이다. 아주 소수의 경우겠지만 아주 유명한 건축가들은 어떤 근거를 떠나 천문학적인 설계비가 드는 경우도 있다.
 
결국 신인의 상대적으로 저렴한 용역비 때문에 기성세대의 입장에서는 시장을 교란시키는 행위로 생각할 수 있지만 어짜피 절대적인 기준을 마련하기 불가능한 상황에서 개인 능력에 따른 가격 경쟁은 오히려 건강할 수 있다. 즉 적정한 서비스료를 정하는 것은 물론 정도의 문제이긴 하지만 절대적이 아닌 상대적인 기준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건축 설계조차 어쩔 수 없이 누구는 살아남고 누구는 접어야하는 생태계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도덕성이나 윤리성처럼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잣대보다는 그것의 상대적인 가치를 중시하되 그 적정한 선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광복 후 70년 동안 우리는 엄청난 경제 성장을 이루었지만 요즘같이 그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는 태생적 이유들 중 하나는 절대적이고 형이상학적 가치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라 생각한다. 아직도 우리는 이분법적으로 편가르기에 익숙해 있다. 현재까지도 이념적 성향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는 것도 결국 우리의 성향인지도 모르겠다. 어쨋든 이제는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왔던 가치와 기준들에 대해서 다시 상대적으로 판단해야할 때이다. 동지와 적을 나누느라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고 가치들을 중용에 따라 재조정할 수 있어야한다. 앞으로 70년 후의 대한민국 미래의 승패는 여기에 달려있다고 믿어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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