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대림 서귀포의료원장

모임에서 여럿이 함께 식당엘 갔는데 보리밥이 나왔다. 어느 선배가 푸념하듯 말했다. '과거에 질리도록 먹던 음식이지만 요즘은 웰빙 음식으로 보리밥이 나오는데 나는 여전히 곤밥이 좋다'고 하면서 따로 쌀밥을 주문해서 먹었다.

필자는 웰빙 음식으로 생각하고 보리밥을 애써 맛있게 먹는 편인데도 그 선배의 말씀에 공감이 갔다.

어릴 적에는 곤밥을 먹기가 쉽지 않아서 잔치나 식개 때에만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기에 그 때를 안 놓치려고 잔치나 식개에 참석해 자기 몫을 꼭 챙기곤 했다.

어디 곤밥뿐이랴. 식사하면서 보리쌀 한 톨을 흘리기라도 하면 곧장 밥상머리 교육이 시작되곤 했다. '보리쌀 한 톨을 만들기 위해서 농부가 얼마나 많은 노력이 들었을까'를 피교육생에게 주입시키며 흘린 밥알은 꼭 주워서 먹게 했다.

결국 절약은 미덕이고, 버리는 것은 가급적 적어야만 하는 당위성이 생겨나게 됐다.

그러나 지금은 소비가 미덕인 시대다. 물자도 풍부해졌고 전처럼 그렇게 굶주리는 사람이 줄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히려 많은 양의 식사로 비만을 부르는 문제가 시작되면서부터는 밥을 남기는 것이 그다지 비도덕적인 문제가 되지 않게 됐다.

특히 가정주부는 식구들이 남긴 밥을 아까워서 먹게 되는데 주부 비만의 원인이 된다는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바로 음식물 쓰레기로 버려지는 일이 많아지게 됐다. 예전에는 '사장님'하면 대중의 선망의 대상이 됐었고, 그 사장님의 나온 배가 트레이드 마크인 적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건강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고 그저 잘 먹을 수 있다는 자체가 부러웠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유전적으로 비만의 소인이 있던 사람조차도 잘 먹지 못해서 마른 채로 있었고, 잘 먹게 되자 비로소 겉으로 비만이 나타나서 '사장님'이 되는 경우를 주위에서 가끔 볼 수 있다.

요즘 식개집에 가보면 나이든 어른 일색이고 어린이나 젊은이는 찾아보기 힘들다.

필자가 어릴 적에 식개집(제사집)은 항상 어린애들로 바글바글했다. 졸린 눈을 비벼가면서 파제하기를 기다리다 일부는 잠이 들었다가도 깨우면 얼른 일어나서 맛있게 식개집 곤밥을 먹었었다.

그 만큼 먹는 것이 절실했기 때문에 식개에 졸린 것을 무릅쓰고 참석하게 되고 식개집 분위기를 활기차게 만들었다.

지금은 그런 유인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고리타분하게 식개에 참석하기 보다는 집이나 PC방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마음 편하다고 여겨서 식개 참석이 저조한 것 같다. '식개' '멩질(명절)' '벌초' 같은 문중의 공동행사들이 과거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라지고 있다.

기억 속에 남아있던 유년기 영상들이 점차로 지워지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앞으로 몇 년 후에는 식개나 멩질 자체의 존립이 위태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마저 든다.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생각 자체도 달라지고 그에 대응하는 태도마저 바뀐다. 결국 관습마저 알게 모르게 달라져야 하는 당연한 면도 있지만, 사라짐에 대한 아쉬운 면도 그에 못지 않게 크게 느껴져서 서글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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