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민 서귀포지사장

3년전 이맘때, 전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환경단체와 전문가들이 제주에 열광했다. '지구촌 환경올림픽'이라고 불리는 '2012 제주 WCC(세계자연보전총회)'에서 천혜의 자연환경이 연일 집중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이 같은 분위기에 세계자연보전연맹(IUCN) 회원총회에서 △세계환경허브 조성 및 평가인정 시스템 구축 △하논 분화구 복원·보전 △독특한 해양 생태지킴이 제주해녀의 지속가능성 △용암숲 곶자왈 보전과 활용을 위한 지원 등 제주도가 제출한 제주형 의제가 모두 채택되는 쾌거를 거두었다.

IUCN은 특히 하논이 보유한 자연유산의 가치를 고려해 '대한민국 정부는 자연환경복원 종합대책을 수립, 시행하고 보전 대상지가 더 이상 훼손이 가속화되지 않아야 한다'고 권고했다. 하논의 지질학적 가치를 인정하면서 중앙정부가 핵심적인 역할을 해주길 기대했다.

하논(126.7㏊)은 개발과 보존의 논란에서 시작됐다. 지난 2000년 한국야구위원회와 프로야구 관계자들이 현지를 답사하면서 프로야구 동계 전지훈련장 논의가 불거졌다. 호근동 소재 하논 일대가 병풍처럼 둘러싸인 분지 형태로, 겨울철에도 바람이 거의 불지 않고 따뜻한 날씨 등으로 최적의 장소로 분석됐다.

하지만 지질학자들이 하논은 대한민국 유일의 마르형 화산체로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며 보존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후 각종 연구가 진행될수록 보전에 무게감이 실렸다.

하논은 지난 5만년 동안 바람을 통해 외부로 유입된 화분·포자 등 지구 기후·생태환경의 변화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과학적 정보를 보존하고 있는 등 '지구 환경의 타임캡슐'과 같은 중요한 자연유산으로 인정받고 있다.

하논 분화구에 집적된 마르형 퇴적층을 통해 고기후·고식생을 분석하고 이를 기초로 동아시아 기후변동 과정을 상세히 규명해 미래 기후까지 예측할 수 있는 장소로 부각됐다.

이 같은 연구로 보존 사업이 추진됐으나 2000억원이 넘는 사업비 조달이 숙제로 남았다. 지방비 확보는 사실상 불가능, 2000년 중반부터 국책사업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으나 중앙절충 능력이 부족한 탓인지, 의지가 없는 것인지 흐지부지됐다. 예산 타령을 하는 동안 지형이 훼손되고 화구호수와 습지가 사라지고 분화구 주변의 원식생도 심각히 위협받고 있다.

이에 따라 국내외 전문가와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하논 분화구가 갖고 있는 지질·기후·생태·환경적 가치에 대한 지속가능한 보전 및 복원 운동이 추진됐고 '하논 분화구 복원 범국민추진위원회'가 결성돼 국민 공감대 형성에 나섰다.

이런 노력으로 '2012 제주 WCC'에서는 정부와 비정부 회원기관(687개)의 압도적인 찬성률로 제주형 의제로 채택되는 등 하논 분화구가 세계적인 환경가치로 인정받으면서 정부 차원의 프로젝트로 추진될 것으로 기대됐다.

하지만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제주 WCC 이후에도 '하논 분화구 복원사업은 막대한 예산 문제로 국책사업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만이 계속 되풀이되고 있다.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중요한 자연유산이라며 제주 WCC에 제주형 의제로 제출한 제주도나 IUCN으로부터 종합적인 자연환경 복원대책 수립을 권고받은 정부 모두 뒷짐이다.

더욱이 국책사업의 당위성을 인정하면서도 서귀포시에서 계속 추진해왔다는 이유로 하논 분화구 복원사업을 행정시에 떠밀고 있다. 도정 역량을 모아 중앙정부를 설득해도 모자랄 판에 정책 결정이나 재정 권한이 없는 서귀포시가 수천억원의 예산이 투입되는 하논 분화구 업무를 맡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고 판단했는지 극히 의심스럽다.

많은 돈을 쏟아부은 제주 WCC가 한바탕 호들갑을 떨었던 잔치에 불과했는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분명한 것은 제주도가 국제사회에 던진 제주형 의제의 약속을 지켜야 하고 이행될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신뢰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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