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태림 수필가·논설위원

오후 다섯시 반이 되면  유치원에서 하교하는 손녀 둘을 데리러 아파트 정문 앞으로 나간다. 아들 내외가 맞벌이 부부라서 그네들이 퇴근할 때까지 한 시간 정도는 아이들과 놀아줘야 한다.

집으로 곧장 들어오기보다는 정문 옆 놀이터에서 놀기를 좋아해서 함께 놀이터로 자주 끌려가는 경우가 많다. 그늘에 가만히 앉아서 아이들이 노는 것을 그냥 바라보기만 하면 얼마나 좋으려만 아이들은 나를 편하게 두질 않는다. 그네를 밀어 주고, 시소를 함께 타고 철봉에 매달리도록 몸을 높게 들어주고, 정말이지 아이들과 함께하기가 쉬운 일이 아님을 절절히 느낀다.

손녀 둘을 데리러 아파트 앞을 나서는 이 시간에 아파트 단지 안에는 온통 노란 버스 일색이다. 어린이집 버스, 유치원 버스, 체육관 버스, 미술학원, 웅변학원, 무용학원 등, 순식간에 좁다란 도로는 노란 버스들로 막히고, 한쪽에서는 하차시키는가 하면 다른 쪽에서는 승차시키느라 북새통을 이룬다. 이 아파트 단지 안에는 노란 버스를 안타는 어린이가 한 명도 없는 것 같다. 취학 전 사교육이 이 정도니 부모들의 노고와 출혈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팽나무 아래 평상에는 나처럼 어린이집이나 학원에서 학습을 마친 손자·손녀들을 기다리는 할머니들이 자주 모인다. 시간이 이를 때는 그녀들과 합석해 그들의 이야기를 종종 듣는 편이다. 대부분 집안의 가정사가 대화의 주류를 이루지만, 그 내용은 활기차고 밝은 쪽 보다는 대개가 집안의 앞날을 염려하는 어두운 편으로 흐르고 있었다.

매사에 적극적인 김 할머니가 언제나 대화를 이끌어 나간다. 주변에선 머리를 끄덕이며 동조하거나 맞장구를 치는 정도다. 아들 내외가 이번에도 장사가 안 돼 영업을 바꿨다고 한다. 예전에는 식당업을 하다가 갈비집으로 새로 개업을 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종업원도 둘이나 두어 그런대로 예상을 넘어 성업을 이루던 식당이 차츰차츰 매상이 내리더니 견딜 수가 없더라는 것이다. 종업원을 내치고 아들 부부가 계속 영업을 했지만 일당은 커녕 깨진 독에 물 붓듯 적자만 늘어 할 수 없이 간판을 내렸다는 것이다. 이번 갈비집도 그 모양이면 쫄딱 망하게 될 것이라며, 길게 쉬는 한숨으로 주변을 심란하고 침울하게 만들었다.

사실 거리에 나서보면 김 할머니의 아들 내외 같은 경우가 한둘이 아닌 모양이다. 우리 동네만 해도 얼마 전까지 눈에 익던 식당이나 상점들이 그 사이 간판이 달라졌거나 영업을 바꾼 곳이 셀 수 없을 정도로 흔하다. 또한 간판은 그대로이나 업주가 바뀐 경우도 많이 보인다.  

어떤 보도에 따르면 가장 많이 생기고 또 가장 많이 사라지는 것이 음식점이라 한다. 하고많은 자영업 중에 음식점이 반을 넘게 차지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특별한 지식이나 남다른 전문성이 없어도 쉽게 도전할 수 있는 영업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요즘처럼 직장을 구하기가 어려운 상황에서는 백수 탈출의 한 방편이기도 할 것이다.

필사의 노력으로 직장을 구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지만 번번이 미끄럼을 타는 젊은이들이 회자하는 자조어린 신조어들이 오늘의 세태를 거울처럼 반영해 주고 있다.

전통적인 가족 구성의 기본인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삼포세대' 여기에 인간관계와 내집마련을 포기한 '오포세대' 취업과 희망(미래)을 포기한 '칠포세대' 그래서 이들의 눈에 비춰진 대한민국은 바로 '헬(hell)조선'이요, '망한민국' '개한민국' '불지옥반도'로 보일 것이다.

이처럼 요즘 우리 사회 일부 젊은이들은 단순한 불만의 수준을 넘어 사회나 국가, 기성세대를 향해 적대감과 경멸감을 세차게 드러내고 있어 한때의 치기어린 반항으로 보기에는 그 뿌리가 깊고 정도가 매우 심하다.

온 나라의 국력을 모아, 이들의 외침에 응답해 '탈조선'을 막아야 할 것이다. 모든 게 힘든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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