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승환 제주문화예술재단 이사장

용연은 전설에서 거녀인 설문대할망이 큰키를 확인하기 위해 들어섰더니 물이 발등까지만 닿았다고 알려져 있는 곳으로 불리는 이름도 다양하다. 용담동지에는 용연, 용수, 용소, 용추를 드는데, 16세기는 용추라 했다. 필자가 어렸을 적에는 민간에서 용수, 용소라 했으며 오늘날은 용연으로 알려져 있다.

용연에 관한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530년의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이다. 가뭄이 들면 마르고, 비가 내려 물이 흘러 웅덩이에 이르면 넘쳐흘러 그 깊이를 알지 못하며, 가뭄이 들면 이곳에서 기도한다고 했다.

1577년 임제는 「남명소승」에서 용연의 물이 맑고 푸르며, 그 안은 아늑해서 어부들이 배를 감추어 바람을 피하는 곳으로 취병담이라 한다고 덧붙였다. 이는 1602년의 김상헌의 「남사록」에서도 거의 동일하다.

1653년 이원진은 「탐라지」에서 용연의 수심은 밑이 없다고 했고 1681년 이증은 「남사일록」을 통해 끝이 없을 만큼 깊다고 서술하고 있다. 1696년 제주목사였던 이익태의 「지영록」에서는 취병담을 설명하면서 포구와 바다 사이는 하나의 띠를 이룬 사장으로 조수가 통하기도 하고 막히기도 한다고 했다.

어렸을 적에 썰물 때 필자가 바지를 걷어 올리고 건너갔던 기억과 일치한다. 또한 그의 「탐라십경도서」에서 제주의 빼어난 경치 10곳을 소개하고 있다. 이때까지도 영주라 하지 않고 탐라라 하고 있는 점이 주목을 끈다.

1702년 이형상의 「탐라순력도」에서는 용연에서 뱃놀이를 하는 그림이 실려 있고, 1954년 담수계의 「증보탐라지」에서는 이를 영주 12경의 하나인 용연야범이라 한다고 한다.

또한 속전에 따른다면서 용연은 신룡이 잠긴 곳으로 용이 살고 있기에 기우제를 지내면 효험이 있다고 전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 용담동 마을지에서는 '전설에 따르면'이라고 해 용궁의 사자들이 백록담으로 왕래하던 입구가 용연이라 한다. 이렇게 볼 때 용연의 수심에 관한 이야기의 근거는 이원진의 「탐라지」에서 시작되고 있고, 용이 살고 있다는 관념은 「증보탐라지」에서 시작됐음을 알 수 있다.

어느 문헌이든 필자가 창작한 것이 아니라 민간에 전승되던 것을 기술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비로소 17세기 중엽부터 용연의 깊이에 관심을 갖고, 20세기에는 용이 거주하는 곳, 그 이후에는 용궁의 사자들이 백록담으로 향하는 곳으로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위 문헌은 경래관들이 제주를 떠나는 시기를 기준으로 살폈지만 그들은 제주에 오면 제주토박이한테서 정확한 정보를 수집,  문헌에 기록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전승되는 전설과는 웬일인지 차이가 있다. 전승되는 과정에서 용연의 수심과 설문대할망의 키 관련 모티브는 아마도 설문대할망의 키에 대한 관심을 구체화시키는 과정에서 형성된 모티브인 듯 하다.

당시의 스토리텔링은 민중의 소산이고, 오늘날처럼 일부 작가의 창작이 아니다. 그래서 설화가 의미 있는 자료가 된다.

설화는 고대 제주 조상들의 자연사상과 인문사상에 대한 해명 방법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