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훈식 시인·제주문인협회 회장

'가냐귀 모르는 식게'란 까마귀도 모르게 지내는 제사라는 제주도 속담이다. 제사는 일가방상이 모여서 지내는 것이 원칙으로 울내에 사는 친근한 이웃도 와서 제에 참여하는 것인데 친족도 불참해야 할 만큼 슬픔이 절절한 제사이다.

그 사연을 유추해보면 조심스럽게 구전돼 왔기에 막연하지만 모셔야 할 신위이기에 제사를 안 지낼 수도 없다.

제수를 진설해 흠향하는 절차를 거치고 지붕 위로 흠향퇴물을 던지면 이튿날 까마귀가 날아와서 그걸 주워먹는 것으로 제사가 끝난다. 까마귀 모르게 지내야 하는 제사는 이렇게 숨겨서 제를 지내다보니 어느 세월엔가는 무덤마저 잃어버리는 사태가 발생한다.

어느 집안 일로, 조선시대에는 정실부인이 죽으면 사세부득이 후처를 두게 되고, 후처 자식은 서자라고 해서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질 못했으니 상놈도 아니고 양반도 아니라서 신분이 말이 아니었다.

정실부인에게는 그나마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 딸이 재산을 몽땅 물려받았으니 사위가 수지맞았고, 서자의 아들들은 감저가 무랑허게(감개가 무량하게) 성씨만 물려받은 채 거지꼴로 추풍낙엽 신세로 떠돌게 됐다.

정실부인에게서 딸만 낳은 조상은 벼슬을 이용해 먼 친족을 양아들로 삼고 당대에는 호령하면서 잘 살았는데 양자 아들의 손자까지는 체면상 벌초를 하더니만 양자끗발이 거기서 소진돼 종국에는 분실수순을 밟았다. 그래도 어느 후손이 꿩 사냥 중에 우연히 덤불 속에서 조상 묘를 발견하는 배려가 있었다고 가승에 적혀 있어 꿈으로 기적을 구현한 혈통임을 자랑한다.

분명 서자도 자식이건만 제대로 된 종족이 아니라니, 이런 억울한 일이 또 있겠는가. 서자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테우리(목동)나 보제기(포작인)로 살다가 가난에 못 이겨 출륙금지령을 뚫고 육지로 갔는데, 막내에게만은 조상 전을 주면서 조상 묘를 부탁했건만 어찌된 일인지 재산도 날리고는 병들어 일찍 죽고 말았느니. 그래도 피붙이니 우여곡절로 조상 묘 가까이 묻기는 했다.

육지 나간 형제들이 돌아와 대대로 묘제를 지내면서 윗대조상들에게는 성대하게 제물을 차려놓고 참배를 하면서도 그 묘에는 직계 후손만 가도록 해, '차롱착에 제물 담앙 강 절만 허여동 오라'는 식으로 박접(냉대)하곤 했다. 제주어로 차롱이라는 것은 대바구니로 된 도시락이고, 차롱착은 뚜껑이 없는 초라한 도시락이라고 비하하는 의미가 숨어있다. 그러다 보니 분명 조상이 물려준 묘이긴 해도 세월 따라 더더욱 누구의 묘인지 모르게 됐고, 다른 조상 묘는 다 있는데 가승에도 없는 그 묘만 분실하고 말았다.

그래도 조상 묘가 없어 가슴 아파하던 직계후손이 일본에서 출세해 이름 없는 묘가 잃어버린 조상 묘로 확신하고 가까운 친족들을 선동해 이묘하는 과정에서 명전을 다시 올리고는 조상의 묘를 되찾은 것으로 괸당 일을 마무리했다. 허나 다른 가지에서는 끝끝내 승복하지 않았다. 그 조상도 아닌데 어불성설이라는 거다. 차라리 잃어버린 채 물려줬으면 그대로 따라야 자손 된 도리라는 거다.

거기다가 가승에는 친족 묘역 성역화에 회비 불참으로 비석에 자신들의 증조부와 조부 이름이 빠졌다는 사실을 후대에 와서야 알고는 친족들의 처사가 섭섭하다고 불만을 터뜨리는 사태도 발생했다.

사실, 돌아가신 조상님은 후손에게 절대로 심술을 피우지 않는다. 성묘나, 제사를 지내주지 않아서 섭섭해 할지언정 후손의 발복에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 조상의 의리다.

유택이 명당자리라 한들 후손들이 일어나라고 하면 일어나야 한다. 도로가 나게돼 이묘를 하면서 보상금을 많이 받게 됐으니 더 좋은 모역을 장만하고 잘 모시면 된다는 거다. 아무튼 그 묘가 진짜냐 가짜냐를 놓고 다수결 투표로 의견일치를 기할 수도 없고 DNA검사도 할 수 없어 난감해도 조상 묘를 찾았다는 쪽에서 올해에도 벌초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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