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희 편집국장

20세기 미술의 거장 앙리 마티스와 파블로 피카소. 두 화가는 치열한 승부욕으로 현대미술을 이끈 라이벌이었다.

피카소와 마티스는 그림을 통해 자주 대립했다. 후원자를 놓고 다투기도 했고 같은 모델을 놓고 다투기도 했다. 둘이 원시미술에 심취한 시기도 같았고 여성을 그리는 경향 때문에 서로 화풍 경쟁도 벌였다. 하지만 두 화가는 경쟁하는데 그치지 않고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기도 했다. 피카소가 '정원에서 잠든 누드'를 그리면 마티스는 '기대어 누운 누드'를 그리는 식이었다. 당시 그림을 보면 피카소에게서는 마티스의 특징이, 마티스에게서는 피카소의 특징이 발견되는 것처럼 두 화가는 경쟁 속에서도 서로를 동경하고 부러워했다.

일생에 걸쳐 라이벌로 대립과 경쟁에 살았지만 결국 두 사람은 말년에 서로를 인정한다. 마티스는 "딱 한 사람만이 나를 평할 권리가 있으니 그 사람이 바로 피카소다"라고 고백했으며, 피카소는 "모든 것을 생각해보니 오직 마티스 밖에 없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분야에 라이벌은 존재한다. 이들의 경쟁은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기도 한다.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 3세를 물리치면서 서구문명의 중흥을 이끈 헬레니즘시대의 문을 열었다.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웰링턴에게 패하면서 유럽에서 싹트던 혁명의 분위기는 사라지고 다시 보수의 시대로 돌아섰다.

유방은 숙명의 라이벌 항우를 물리치고 중국 천하의 패권을 쥘 수 있었다.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질투한 살리에르, IT산업계의 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 패션 디자인계의 코코 샤넬과 엘사 스키아파렐리, 피겨선수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 등 역시 경쟁을 통해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라이벌들이었다.

라이벌의 사전적 뜻은 '같은 목적을 가졌거나 같은 분야에서 일하면서 이기거나 앞서려고 서로 겨루는 맞수'라고 돼있다. 강물을 함께 사용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라틴어 '리발리스'(rivalis)란 말에서 유래했다. 강물이 풍족하면 함께 나눠 쓰는 이웃이자 친구가 되지만, 부족하면 싸움을 벌이게 된다.

강을 따라 형성된 마을들은 소유권을 정할 수 없는 강물을 놓고 늘 같이 쓰며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라이벌은 적과 다르다. 적은 제거해야 할 대상이지만 라이벌은 대립하면서도 때로는 협력하는 공존공생의 대상이다. 그래서 라이벌은 서로 불편한 존재이지만 성장과 발전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지금 제주도는 내년도 예산안 편성작업이 한창이다. 그런 가운데 원희룡 제주도지사와 구성지 제주도의회 의장이 서로 대립각을 세우면서 자칫 지난해 겪었던 예산갈등이 재연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원 지사가 "잘못된 관행을 끊고 공정한 기준에 따라 예산을 배분하겠다"며 도의원들에게 일정액으로 배정되던 의원 사업비에 대해 비판하자, 구 의장이 경로당 예산편성 문제를 들며 "표로 심판해야 한다"고 맞불을 놓고 나선 것이다. 결국 지난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며 도와 도의회간 합의를 거쳐 만든 예산협의체도 무용지물이 될 위기에 놓였다.

도지사와 도의회 의장은 제주지방자치를 이끄는 두 기관의 수장이자 맞수다. 한쪽은 정책을 집행하고 한쪽은 이를 감시·견제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가도록 하는 막중한 책임을 진다. 그 과정에서 의견이 맞지 않아 충돌할 수도 있지만 지향점은 도민행복과 지역발전이란 점에서 서로 같다. 지사와 의장은 이를 위해 서로 대립하면서도 협력·공생하는 관계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제주를 대표하는 두 수장이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기보다 흠집내기에 급급한 지금의 현실은 대립만 있고 상생·공존은 찾아볼 수 없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도민 몫으로 돌아오게 된다. 상대방의 목소리에 귀를 닫고 제 말만 앞세우며 파국으로 치닫기보다 도민만 바라보겠다던 초심을 다잡고 도민의 행복과 지역발전을 위해 합리적 비판과 대화·타협으로 상생하는 진정한 라이벌의 모습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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