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슬옹 미국 워싱턴글로벌대 교수, 훈민정음 해례본 복간본 해제
"비주류 문자였지만 왕실과 민간에서 사용되며 발전"

국보 제70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훈민정음(訓民正音) 해례본은 세종이 새로 만든 문자인 훈민정음을 해설한 책이다.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물이라는 의미의 '무가지보'(無價之寶)로 평가된다.
 
세종은 1443년 12월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1446년 9월 훈민정음 해례본을 간행해 세상에 널리 알렸다. 세종의 명을 받아 펴낸 해례본 초간본은 역사에서 자취를 감췄다가 1940년 경북 안동의 고택 서재에서 발견됐다.
 
약 500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훈민정음 해례본은 간송 전형필에게 소유권이 넘어갔고 신문과 잡지에 관련 내용이 실리면서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한글날을 앞둔 지난 6일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소장한 해례본을 원본 그대로 되살린 복제본이 공개됐다. 교보문고가 제작을 맡은 이 책에는 20년 동안 훈민정음을 연구한 김슬옹 미국 워싱턴글로벌대 교수의 해설서가 포함됐다.
 
 
(서울=연합뉴스) 이정훈 기자 = 7일 오후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 전시된 훈민정음 해례본 복간본과 해설서. 2015.10.6 uwg806@yna.co.kr
서울 광화문에서 7일 만난 김 교수는 "한글은 지식과 정보를 백성과 나누고자 했던 세종의 꿈과 당대의 과학, 철학 사상이 투영된 문자"라고 강조했다.
 
"훈민정음과 관련해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지식이 꽤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한글을 공동 창제했다고 생각하지만, 한자가 성리학의 상징이자 소중화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던 시대에 공개적으로 문자를 만든다는 건 상상할 수 없었어요. 세종이 비밀리에 추진하면서 집현전 학사들에게 조금씩 도움을 받았다고 봐야 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세종이 한자와 이두가 복잡한 문자라고 지적한 때는 1426년이다. 그는 한자로 된 법조문을 조금 더 쉽게 알리는 방안을 고민했고, 1434년 그림풀이가 덧붙은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발행했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못한 세종은 모든 사람이 쉽게 익힐 수 있고 쓰기 편한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김 교수는 훈민정음 반포 이후 사대부의 반대가 심했다는 이야기에 대해서도 "학자들이 훈민정음을 좋아하지 않고 비주류 문자로 여겼지만 심하게 반대하지는 않았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상소를 올린 최만리조차도 언문(훈민정음)은 매우 신묘하고 기묘하다고 밝혔다"면서 "성리학자들은 부인과 딸에게는 언문을 쓰고 학문을 할 때는 한자를 사용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말했다.
 
조선시대에 훈민정음은 한자를 보완하는 문자의 역할을 했지만 꾸준히 발전했다. 왕실에서 한글 사용을 장려했고, 각종 문학 작품과 실용서에 두루 사용됐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훈민정음이라는 문자만큼이나 해례본에 얽힌 이야기도 흥미롭다"면서 "암호 같은 문장 부호들이 있고, 왕이 저술한 부분은 신하들이 서술한 부분에 비해 글자가 크다는 점이 독특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간송미술문화재단이 보유하고 있는 해례본은 발견 당시 세종 서문의 첫째 장과 둘째 장이 찢긴 상태였고, 훼손된 것을 누가 어떻게 복원했는지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고 덧붙였다.
 
지금까지 알려진 훈민정음 해례본은 1940년에 나온 간송본과 2008년 경북 상주에서 발견된 상주본이 있다. 소유권 분쟁과 절도 소송에 휘말렸던 상주본은 현재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김 교수는 "훈민정음 해례본은 적지 않은 분량을 인쇄했을 가능성이 크다"라며 "온전한 해례본이 어딘가에서 잠자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훈민정음 간송본에는 뒷면에 낙서가 있어요. 지금까지 드러난 바로는 그 내용에 '십구사략언해'가 있다는 거죠. 낙서의 주인공은 아마도 한글을 잘 쓰고 좋아했던 사람 같아요. 낙서를 판독해서 내년쯤 결과를 발표할 예정입니다."
 
그는 "훈민정음에 대해 아직도 연구해야 할 과제가 많다"면서 조선의 사대부들이 훈민정음을 주류 문자로 채택했다면 역사는 확연히 바뀌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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