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달호 전 유엔훈련연구기구 제주국제연수센터 소장

서울에 살면서도 늦가을 도시 곳곳 노변 가게 앞을 노랗게 장식하는 감귤이 늘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언제 보아도 감귤은 탐스럽고 먹음직스럽지만 그 감귤이 어떤 나무에서 어떤 모양으로 달려 있는지 제주에 내려오기 전에는 본 적이 없었다. 겨울이었으니 아마도 수확 철이 끝날 무렵이었으리라. 나무를 덮은 눈 사이로 주황색 감귤이 드문드문 매달려 있는 모습이었다. 주위가 온통 감귤 밭인 해안마을의 어느 펜션에 있을 때, 맑은 공기만 해도 천국이 아니냐고 하던 아내는 도시에서 겪을 수 없는 낭만에 빠졌고 이내 제주에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한 모양이다. 아내의 결심을 존중한다는 데 더해 이런저런 연고로 제주에 산지가 꼭 6년이다.

겨울이 가고 아파트로 이사를 한 후 인근의 감귤 밭을 지나다니면서도 별로 의식하지 못하고 보냈다. 봄이 무르익던 어느 날 동네를 산책하다가 익숙지 않은, 그윽한 향기가 코끝을 스쳐갔다. 앙증맞은 그 하얀 꽃이 눈에 띄지도 않았으니 무슨 향기인지도 모르다가 한참 후에야 '아! 그게 바로 감귤 꽃 향기였구나' 하고 깨달았다. 나무에 매달린 감귤을 보는 것만도 예사롭지 않은 선물인데 이렇게나 멋진 꽃향기까지 우리에게 주고 있으니 감귤이란 존재가 참으로 고맙고 대견하지 않은가.

언젠가 이탈리아 남부의 아말피란 곳을 들른 적이 있다. 아름답기로 유명한 굴곡진 그 해안도로를 달리면서 언덕 아래 레몬 밭을 지나게 되었다. 버스 옆자리에 앉은 독일인 관광객이 내게 문득 말을 걸어왔다. "이거 아세요? 이탈리아를 좋아한 괴테가 바로 이곳의 풍요로운 레몬나무들을 보고 '레몬의 나라(Land der Limon)!'라고 하면서 감탄했다는 걸요?" 중등학교 선생님이라던 이 분에게 괴테의 말에 공감한다고 하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즐거워하던 기억이 새롭다. 감귤 천지인 제주에서 나는 괴테를 흉내 내어 이곳을 '감귤의 나라'라고 부르고 싶다. 제주라는 이미지에서 감귤이 차지하는 부분이 그만큼 크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삼다도로 알려진 제주를 필자는 사다도로 불러야 한다고 본다. 바람, 돌, 여자가 많다고는 하지만 감귤을 빼고 제주를 생각할 수 있을까. 바람과 돌이라는 자연 현상, 여자라는 사회 문화 현상, 거기에 농산물의 대표격인 감귤을 더해야 제주의 이미지가 제대로 전해질 거란 생각이다. 감귤은 제주에서 나지만 겨울철 우리나라는 곳곳이 감귤 세상이 된다. 우리가 가장 많이 먹는 과일이 감귤이라고 하지 않던가. 뿐 아니라 극장 안에까지 들고 들어가서 먹어도 되는 과일이 감귤이다. 생생한 질감과 향기로운 풍미로 껍질마저 버리기 아까운 게 감귤이 아닌가. 늦가을과 한겨울에 새콤달콤한 감귤 맛을 볼 수 없다면 세상이 참 건조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감귤은 먼 탐라시절부터 뭇사람들이 탐하던 이국적 열매가 아니었을까 싶다. 고려에서 조선시대까지는 왕실의 귀한 진상품이었다니 어쩌면 그 시대 백성들에게는 꿈에나 품어 볼 수 있는 과일이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감귤을 재배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순탄치 않은 바닷길로 감귤을 한양으로 올려 보내는 일도 결코 간단치 않았을 터이다.

그러던 감귤 농업이 어쩌다가 오랜 동안 피폐한 상태로 있다가 1960년대부터 다시 제주의 생명산업이 되고 감귤나무는 대학나무가 된 것이다.

지금은 감귤이 남아도는 형편이라 감귤 농가들의 조바심을 사기도 하고 또 근자에는 감귤 소득을 불리기 위해 억지 수단들이 사용되기도 한다니 안타깝기만 하다. 감귤은 물론 소득증대가 중요하지만 감귤이란 특별한 존재에 어린 정서를 지켜나가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제주의 미래, 세계 속의 명품 감귤'이란 주제로 서귀포에서 열리는 제주국제감귤박람회(Jeju International Citrus Expo)를 계기로 감귤꽃과 감귤의 향기를 되새겨보고 그 귀중함을 다시금 느껴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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