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승환 제주문화예술재단 이사장

조선조에 제주도를 찾던 인물들이 남긴 글 속에서 용두암을 찾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임제의 「남명소승」이다.

그로부터 30년 후 김상헌은 「남사록」에서 용두암에 오르려고 했지만 날이 저물고 바람이 불어 오르지 못해 바라보기만 하다가 돌아왔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용두암은 제주 서쪽 3리에 있고, 바다에서 솟아난 것이며, 올라서면 추자도까지 볼 수 있을 정도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용두암에 대해 높이 솟은 바위는 자라가 머리를 웅크리고 있고, 용이 서렸다가 바닷물을 들이키는 모습으로 노래하고 있다.

다시 50년 후 이원진은 「탐라지」에서 용두암은 제주 서쪽 5리에 있있고, 북쪽 바다에 닿은 기슭의 절벽이 꾸부러져서 마치 용의 머리 모양 같으며, 그 위는 편편해 앉을 수 있고, 앞의 돌들이 기이하며, 용연과 포구의 어촌이 아름다움을 내려다볼 수 있다고 한다.

또 30여년 후 이증의 「남사일록」의 기록도 김상헌, 이원진과 다르지 않다. 그러면서도 이증은 용두암에 대한 시에서 '왜 용두라 했을까'라고 자문하고, 이에 대해 '바다에 들어가 물을 마시는 모양은 쪼그리고 앉아서 머리를 쳐들고는 화가 난 듯 이마를 감싸서 언덕에 오르려고 다시 몸을 일으키며 비늘을 터는 듯하다'고 해석한다.

그로부터 160여년이 지난 1843년 이원조의 「탐라지초본」이나 또 다시 110여 년이 지난 1953년 담수계의 「증보탐라지」에서도 임제, 김상헌, 이원진, 이증의 기록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던 것이 20세기에 들어 1959년 강성보 님이 제보한 것이라며 새로운 내용이 등장한다.

힘센 장수가 꾀를 내어 용이 되고자 하던 백마를 붙잡았는데, 백마가 하늘을 향해 3번 울자 갑자기 비바람이 쏟아졌고, 날이 개자마자 백마는 물속에 잠긴 채 바윗돌로 굳어져 있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오늘날 관광객에게 알리는 설명으로 고정됐다. 또 다른 설명으로는 용왕의 사자가 한라산 불로장생의 약초를 캐러 왔다가 산신이 쏜 화살에 맞아서 죽었는데 그 시체가 물에 잠기다가 머리만 물 위에 떠 있다고 하거나, 용이 승천하려 한라산 산신령의 옥구슬을 물고 달아나려 하자 산신령이 화가 나 화살을 쏘니 맞아 바다로 떨어졌는데 몸체만 바닷속에 잠기고 머리는 울부짖는 모습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16세기 말, 임제가 제주에 왔을 때부터 1953년 「증보탐라지」까지 외형적으로 용의 머리 같다고해 붙였던 것이 갑자기 스토리텔링 됐다.

해방 이후 제주가 살기 위해서는 제주의 모든 것을 관광자원화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강했다.

그 당시는 없는 전설까지 만들어 붙여야 하지 않느냐고 목청을 높였지만, 이처럼 변모된 자료가 오래전부터 전승된 것처럼 알려지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제보자가 있다고 해서 책임을 면할 수도 있겠지만, 자료에 대해 검토하고 취사선택하는 신중함은 필요하다.

오늘날 인터넷에서 용두암을 검색하면 스토리텔링된 자료가 뜬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삭제하려면 시간과 노력이 상상할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후학들은 잘못된 자료로 연구논문을 쓰게 될 것이니 그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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