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성 이사·논설위원실장

반세기 동안 '금기의 벽'에 갇혀 있던 제주4·3사건을 양지에 드러낸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제주4·3특별법)이 제정되기까지에는 엄청난 진통이 뒤따랐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자유당 정권이 몰락한 1960년 4·19혁명 이전까지 남로당에 의해 주도된 공산반란으로 취급되던 4·3사건은 그 해 5월23일 국회가 '양민학살진상조사단'을 구성, 제주도를 방문함으로써 진상 규명을 위한 첫 조사활동이 시작됐다.

하지만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조사단 활동이 중지된 뒤 4·3에 대한 논의는 일체 금기시되다 1987년 12월 실시된 제13대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후보(평민당)가 처음 '4·3 진상규명'을 공약으로 내걸면서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어 국민의 정부 시절인 1999년 12월16일 마침내 국회가 4·3특별법을 여야 만장일치로 통과시키기에 이르렀다.

이듬해 1월 공포된 이 법은 4·3사건이 발생한지 50여년이 지나는 동안 그 원인과 억울한 희생자에 대해 많은 논란이 제기돼 왔음에도 국가차원에서의 진상규명이 없었고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회복조치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반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4·3사건의 진상을 철저히 규명한 다음 희생자와 그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주려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따라서 이 법은 4·3사건의 진상 규명 및 희생자와 유족의 명예 회복을 통해 인권 신장과 민주 발전 그리고 국민화합에 이바지하기 위함일뿐 4·3 당시 진압 군경이나 그 유족들에 대해 역사적 가해자의 낙인을 찍는 등 명예를 훼손하려는 의도나 내용은 조금도 담겨 있지 않다.

특히 2003년 10월15일 정부차원의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되자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같은 달 31일 제주라마다호텔에서 민간인 대량 학살이라는 국가공권력의 잘못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노 대통령은 또 2006년 4·3평화공원에서 열린 제58주기 4·3위령제에 국가원수로서는 처음 직접 참석, 화해와 상생을 기원했다.

이처럼 4·3특별법을 계기로 화해·상생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는 가운데 특별법을 무력화하려는 일부 보수단체와 극우인사들의 책동이 그치지 않아 도민사회를 공분케 하고 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자 이인수씨, '제주4·3사건 역사바로세우기 대책위원회' 공동대표 이선교씨 등은 2009년부터 '4·3특별법에 의한 일부 희생자 결정 위헌 확인' 헌법소원과 '희생자 결정 무효 확인' 청구소송 등 모두 6건의 헌법소원, 행정소송 및 국가소송을 제기했다가 모두 각하 또는 기각 판결을 받았다.

그러다 최근에는 보수단체인 4·3정립연구유족회의 민원 제기에 따라 행정자치부가 제주도에 제주4·3평화공원 위패봉안소에 모셔진 희생자 53명에 대한 사실조사를 요구, 물의를 빚고 있다.

4·3특별법은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희생자 및 유족의 심사·결정에 관한 사항을 심의·의결하되 희생자 및 유족의 결정에 이의가 있는 사람에 한해 재심의를 신청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결국 이들 보수단체 등은 소를 제기할 자격을 갖추고 있지 않으며 헌법재판소와 대법원도 이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제주도가 지난 11일 행정자치부에 '도민 의견을 충분히 수렴한 후 실시하겠다'고 회신, 사실조사는 잠정 중단됐지만 행자부가 강행 의사를 보여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다.

게다가 한 번 정부를 앞세워 희생자 결정에 대한 뒤집기를 시도한 보수단체들이 그냥 물러설지는 미지수다. 어떻게든 사실조사를 강행, 꼬투리를 잡아서라도 재심의까지 끌어가려고 할 것이 뻔하다. 그렇게 되면 희생자 재심의는 물론 위령사업에 대한 국고지원마저 위헌으로 몰고가는 등 4·3특별법 형해화를 시도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도민들은 보수단체에 부화뇌동하는 정부가 사실조사를 스스로 철회할 때까지 한 치의 경계심도 늦추지 않고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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