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승환 제주문화예술재단 이사장

차귀도는 한경면 고산리 수월봉 앞바다에 자리 잡고 있다. 차귀도가 나타나는 가장 오랜 문헌기록은 1530년 발간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대정현 서쪽 차귀현에는 대섬이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다만 차귀도가 아니라 대섬이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

1300년에 고려 충렬왕은 제주에 동도현과 서도현을 뒀는데, 차귀는 서도현에 있었다. 이것으로 생각하면 차귀라는 지명은 오랜 역사를 지닌다. 민간에서 자귀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자귀가 차귀로 정착됐음을 유추할 수 있다.
제주도의 부속도서로 제주본도에 속해 있는 것으로는 구좌읍의 우도, 한림읍의 비양도, 대정읍의 가파도와 마라도가 있다. 제각각 섬 이름을 독자적으로 갖고 있다. 구좌읍에 속했다고 구좌도가 아니며, 한림읍에 속했다고 한림도가 아니다. 그런데, 차귀현에 속해 있다고 해서 차귀도로 불리니 아쉽다. 

오늘날 차귀도는 과거 문헌에서 어떻게 명명됐을까?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을 이어 1653년 이원진은 「탐라지」에서 왜구가 자주 들어오는 곳으로 고산 앞바다에 있는 대섬을 들고 있다. 대섬 동남쪽에 배가 머물 수 있는 곳이 있으며, 이곳이 왜구가 머무는 곳이라 한다. 이 섬을 문헌 기록에서는 죽도(竹島)라 한다. 1702년 이형상의 「남환박물」에서도 이원진과 내용이 같다. 세월이 흘러, 1876년 일본의 육군문고에서 출판한 지도를 저본으로해 1894년에 발간한 지도인 '조선전도'의 제주 부분에도 죽도이다. 이 지도는 우리나라에서 제작한 '조선8도전도'와 중국이 만든 '대청일통도', 영국 미국 등 서구 열강이 만든 해도 등을 종합해 제작한 지도이기에 그 진실성은 한층 신뢰가 간다. 

이러던 것이 1917년 조선총독부가 제작한 '제주지도'에서 차귀도로 등장한다. 죽도라는 이름은 삭제돼 버렸다. '제주지도'는 일제강점기인 1910년부터 1918년까지 토지조사 사업을 추진하면서 만든 것이다. 그 이후부터 현재까지 모든 지도에서 죽도는 삭제되고, 차귀도로 통일된다. 일제는 조사 당시 민간에서 전승되는 용어까지 고려했을 것이다.  그래야 죽도에서 차귀도로의 변화가 합리성을 지닌다. 

호종단 전설은 차귀의 뜻을 풀어준다. 호종단은 송나라 사람으로 고려에 귀화해 큰 벼슬을 한 자이다. 이러한 인물이 제주의 지혈과 물혈을 끊기 위해 제주에 들어와서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려는데, 한라산신의 아우가 그를 차귀도(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비양도)에서 수장시켰다고 한다. 호종단이 돌아감을 막았다 하여 후대 사람들은 차귀(遮歸)로 고쳐부르게 됐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대섬에서 차귀도로 바뀌자 비양도이던 것이 차귀도의 지명유래담으로 변모하기 시작한 듯하다.

고산리 주민들은 호종단이 비양도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대섬 곧 차귀도에서 죽었다고 믿고 그렇게 전승하고 있는 셈이다. 가장 오랜 기록 내용의 근거인 비양도는 줄거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호종단 설화는 1959년 수집됐다. 1919년 조선총독부 지도의 차귀도 기록 이후 40여 년이 지난 후이다. 짧은 시기에 오랜 전승 내용이 변모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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