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대림 서귀포의료원장

장례의 방식은 전 세계적으로 여러 가지가 있다. 매장, 수장, 풍장, 조장, 화장 등 다양하다. 우리 국민들은 아마도 전통적으로 매장을 선호했던 것 같다.

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묘가 도굴 당했을 때 국가적 수치로 알고 적극 대응했었고, 천주교에서는 죽은 뒤에 다시 부활할 거라는 종교적 믿음으로 매장을 한다고 했다. 사람이 태어난다는 것은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것이고 결국에는 죽는다는 것은 다시 무로 환원되는 과정인 셈이다. 사람의 몸에서 유리된 영혼이 떠돌다가 결국에는 사라지고 잊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장례문화의 변천과정을 보면, 선사시대에 정착생활을 시작한 신석기인들은 주검을 주거지와 인접한 흙 속이나 조개더미 밑에 넣어 매장했으며, 이후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에 걸쳐 주로 돌이나 항아리 등을 이용하는 다양한 형태의 무덤들이 만들어졌다. 선사시대의 대표적 기념물인 고인돌은 주로 청동기시대 막강한 정치권력을 가졌던 지배계급의 무덤이다.

삼국시대 초기에는 각국마다 토속 신앙이 난무했으나, 삼국시대 중반 이후 불교와 유교, 도교 등 다양한 종교가 한반도에 전래되면서 전통적인 상장례문화에 대한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됐다. 중국의 문화 영향으로 부모에 대해 삼년 동안 상을 치르는 유교식 상장례가 널리 행해졌다.

남북국시대는 불교를 국교로 삼으면서 화장 장례문화가 크게 확산되면서 이로 인해 승려나 귀족, 왕 등의 지배층까지도 성행했다. 따라서 매장의 풍습은 점차 감소했고, 이러한 장례풍습은 고려시대까지 영향을 미쳤다.

고려 후기 주자학의 도입과 함께 주자가례가 전래돼 유교적 도덕규범이 보급되면서 유교식 장례문화가 점차 확산됐다.

조선초기부터 성리학이 국가 통치이념으로 정착되면서 유교문화의 전국적인 보급과 함께 삼국시대부터 성행돼 온 화장 문화가 크게 쇠퇴하고 매장 풍습이 보편적인 장례방식이 됐다.

일제 강점기에는 화장장과 공동묘지가 도입됐으나, 이후에도 유교적 영향으로 매장이 장례문화의 주를 이뤘다.

그러나 지속적인 산업화와 고도의 경제성장 추진에 따라 수도권 대도시를 중심으로 도시화가 급속하게 전개됐던 1980년대 이후부터 묘지 구입난으로 인해 화장이 점차 증가하기 시작했다. 결국 불교적인 화장문화와 유교적인 매장문화의 반복 과정을 거쳐서 오늘날에는 화장 중심의 장례문화로 변화 중인 셈이다. 

보건복지부에 의하면 2014년도 전국 화장률이 79.2%였고, 제주에서도 63.5%가 화장을 하는 것으로 발표됐다. 여러 가지 이유로 매장보다는 화장을 선호하게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우선 경작지가 줄어들고 있다는 현실적인 이유가 가장 컸을 것이다. 둘째로 벌초 문제다. 과연 후세들이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벌초를 제대로 잘 해줄 수 있을까에 대한 강한 의구심을 품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교문화에 대한 신뢰가 저하된 것도 한 원인이 될 것이다. 

이유를 막론하고 오늘날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화장중심 장례문화는 국토의 효율적 이용과 장례절차의 허례허식을 줄이고 장례비용의 절감이라는 국가적 차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