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만익 탐라문화연구원 특별연구원·논설위원

가파도는 신생대 제4기 화산활동을 통해 만들어진 화산섬이다.

이곳은 「성종실록」(1491)에 "가파도에 있는 아마(兒馬) 3필을 준마로 여겨 별도로 길렀다"는 기록으로 처음 역사에 등장한다. 1653년에는 하멜의 표류기를 통해 '케파트'라는 이름으로 서양에 알려졌다. 

가파도는 자랑거리가 많다.

청보리 축제는 유명세를 타며 입도 관광객들이 증가하고 있다. 청보리는 지난해 11월경에 파종해 다음해 6월경에 수확하는 작물로, 가파도의 중요한 경관자원이 되고 있다. 

가파도 주민들은 인심도 좋다.

필자는 1985년 여름, 제주대학교 사회교육과 사회조사팀의 일원으로 가파국민학교에 머물며 전통가옥, 토지이용, 물, 돌담, 선사유적 등에 대해 조사했던 경험이 있다.

조사 일정이 끝나 돌아갈 무렵, 태풍을 만나 고립됐고, 준비해갔던 식량이 모두 소진돼 어려움에 처해 있었을 때, 가파도 부녀회에서 비상식량을 마련해 제공해줬다. 그래서 30년이 지난 현재도 가파도는 인심 좋은 섬으로 기억되고 있다.
  
가파도는 농산물로도 풍부한 섬이었다. 이곳은 1970년대만 해도 보리와 함께 고구마, 참외, 수박 생산지로 유명했다. 「가파도지」(1987)에는 제주도에서 고구마가 가장 먼저 재배됐다고 기록돼 있다.  

가파도에는 조선시대 검은쉐(흑우)를 길렀던 '가파도별둔장'이 있었다.

「제주읍지」에 따르면, 이 목장은 1750년 제주목사 정언유에 의해 설치됐으며, 목장의 규모는 주위 10리, 흑우 103수가 방목됐다. 인근의 모슬포 조방장이 우감을 겸직했고, 색리 1명, 군두 1명, 목자 8명이 목장을 관리했다. 이곳의 검은쉐는 우수성을 인정받아 조정에 진상됐다. 

그러나 조선말기로 들어가면서 이 목장은 점차 부실화되고, 인근 마을주민들이 가파도 개척을 적극 요구했다.

이러한 상황은 「승정원일기」(1823)에 "가파도의 소들은 공헌하기에 적당하지 못해 부근 목장으로 나눠 배치하고, 백성들에게 목장토를 개간해 먹고 살게 하라"는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1840년 가파도에 40여명이 탄 영길리국(영국) 배 2척이 정박해 포를 쏘고 소를 겁탈해 가면서 가파도에 남아있었던 흑우들을 모동장으로 옮긴 결과, 목장토는 인근 마을주민들에 의해 농경지로 개간됐다. 

가파도 전체는 검은쉐 목장이었다. 이 점을 이용해 가파도에서 전국 유일의 '제주 검은쉐(흑우) 축제'가 열렸으면 한다.

청보리 축제의 성공에 힘입어 더 많은 관광객들을 지속적으로 가파도로 유인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문화상품 개발이 필요하다. 청보리는 겨울부터 여름까지 볼 수 있는 작물이므로 가을철에 가파도를 알릴 수 있는 콘텐츠가 있었으면 한다. 이 시기에 '제주 검은쉐 축제'는 안성맞춤일 수 있다.  

이제부터라도 가파도 주민들은 검은쉐를 길렀으면 한다. 이것은 조선시대 가파도에 있었던 검은쉐 목축전통을 계승하는 일이기도 하다. 마을 정착 주민들의 검은 쉐 사육에 대한 적극적 의지가 있으면 가능할 것이다.

처음에는 한 마리로 시작하고 점차 그 수를 늘리면 언제간 가파도는 검은쉐의 섬이 될 수 있다. 이 또한 가파도의 매력적인 관광자원이 될 것이다. 청보리 축제와 검은쉐 축제를 분리해 개최하기 어려울 경우, '가파도 축제'라는 이름으로 두 축제를 동시에 진행하는 것도 대안이다. 

청보리가 누렇게 익어가는 이번 주말 연휴에는 가파도로 가자. 가파도에서 청보리와 검은쉐를 함께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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