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문철 전 제주도교육청 교육정책국장·논설위원

TV를 켜니 어느 원로 인기탤런트의 제주여행기를 르포 형식으로 전한다. 잠시 들여다보노라니 제주의 곳곳을 다니다 한 언덕바지에 이른다. 그때 마침 한 팻말이 문득 내 눈길을 멈추게 하는 게 아닌가. 얼른 보기에 별난 모양새도 없이 그저 조촐한 널빤지였지만, 정작 나의 시선을 멈추게 한 것은 거기 적힌 한 줄의 문구였다.

'오늘은 내 생애의 남은 날 중에 내가 가장 젊은 날'이란 문구를 보며 문득 생각해보니 오늘은 정말 그냥 오늘이 아니라, 앞으로 얼마나 남았을지 모를 내 생애 중에 내가 가장 젊은 바로 그날이 아닌가. 사실 오늘이란 시간은 어제 죽은 이들이 그토록 살아보고 싶어 하던 바로 그 내일이지 않은가.

이 아침 어느 이름 모를 이가 던졌을 작은 돌멩이 하나가 고요한 나의 심연(心淵)에 소리 없는 파문이 일게 한다. 나는 사실 이제까지 오늘이 그런 날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문득 세기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단편 「세 가지 의문」의 기억이 떠오른다.

한 임금이 국사(國事)를 앞에 두고는 세 가지 의문을 품고 골똘히 생각에 잠기다 어느 날 당시 성인이라 불리던 은둔의 현자(賢者)를 찾아 시골 나들이를 한다. 그를 만나자 마침내 세 가지의 의문을 털어놓으며 속 시원한 답을 구한다. 첫째 나에게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인가? 둘째 나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셋째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현자가 얼른 대답을 하지 않고 뜸을 들이노라니, 때마침 인근 야산의 숲 속에서 내려온 듯해 보이는 한 젊은이가 피투성인 채로 달려와서는 도움을 청한다.

임금은 황급히 자기 옷깃을 찢어내어 핏자국을 닦아내고 싸매어 준다. 곁에서 물끄러미 이 광경을 지켜본 현자는 답은 이미 나왔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의 대답은 간명했다. 즉 임금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시간은 바로 지금이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앞에 있는 바로 그 젊은이이며,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그를 보살펴주는 것이라고. 임금은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한 낯빛을 보이며 자리를 뜬다. 

그렇다. 결국 인생이란 '시간·사람·일' 의 함수관계에 다름 아니다. 이 중에 어느 한 가지라도 놓치고 만다면 적어도 인생의 1/3은 실패하는 결과를 낳을는지 모를 일이다.

기회와 관련한 세 가지의 인간 유형을 보자. 즉 코앞에 닥친 기회를 온 줄도 몰라 놓치는 사람, 긴가민가하다 놓치는 사람, 눈치 채고 꽉 붙잡는 사람이 그것이다. 이처럼 생애를 통해 기회는 시간이라는 마차를 타고 몇 번이고 나를 찾아오는데, 그 가장 중요하고도 적절한 '시간' 을 놓쳐버린다면 이보다 더 후회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또 하나의 의문은 바로 '사람'이다.

은행가(銀行街)에서는 고객을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고 한다. 고객의 30%는 은행 측에 이윤을 창출시켜주고, 다른 30%의 고객은 오히려 비용(손해)을 떠안겨주며, 나머지 40%는 고객 수에 이바지하는 정도 외로는 별다른 이윤도 손해도 발생시키지 않는, 이른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고객이다.

이쯤 되면 나는 과연 어느 부류의 고객일까? 우리는 너나없이 나에게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사람을 찾기에만 부심하기 일쑤다. 그러나 이웃에게 나 자신은 과연 어떠한 사람일까를 엄숙히 자문해 보는 일은 그 못잖은 일이지 않을까? 

이제 한 가지가 남았다. 바로 우리가 날마다 하는 '일' 이다. 우리는 평생 일을 통해 희비애락을 경험했고, 또한 많든지 적든지 일을 통해서 생계를 유지해 왔다. 따라서 행복은 일과 깊은 연관이 있다. 동화 '피터 팬' 의 작가로 유명한 영국의 소설가 겸 극작가인 제임스 베리는 갈파한다. "행복의 비결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보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좋아하는 것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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