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승환 제주문화예술재단 이사장

방선문은 용연으로 흘러 들어가는 한내의 상류에 있는데, 근래에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그 뜻은 신선을 찾거나 맞이하는 문이라는 것으로 바위가 문처럼 위로 들려 있는 모양을 본 딴 이름이다. 

민간에서는 이런 형태를 따서 이 곳을 '들렁궤'라고 부른다. 궤는 위로 큰 바위나 절벽 따위로 가리워져 공간이 생긴 굴을 부르는 제주어다. 비를 가릴 수 있을 만큼 가리워져 있으니 바위가 '들러진'이라는 뜻으로 '들렁'이라 불린 것 같다. 

이곳이 알려지게 된 이유는 17세기 말 이익태가 영주10경을 노래하면서부터다. 18세기 초에는 이원진이 8경을 노래한다. 19세기 중엽의 오태직도 8경을 노래했지만 뒤이어 19세기 중엽 이원조와 이한우는 다시 10경을 선정해 노래하고, 20세기 담수계의 「증보탐라지」에서는 12경을 노래하고 있다. 아름다운 경치를 노래하는 것이 처음에는 중국에서 영향을 받아 8경을 선정했지만 시대를 지나면서 10경, 12경으로 노래하고 있음을 보면 틀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선비들의 확장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문제는 아름다운 경치의 하나인 이곳이 '방선문'이라는 이름과 그에 따른 전설이 남겨져 있어 그 창작 시점이 언제인가 하는 데 있다. 전설에 따르면 중복날 선녀가 내려와 방선문에서 목욕하고 돌아간다는 말을 듣고 한 선비가 숨어 엿보다가 들켰다. 선녀들은 황급히 돌아가고 이 사실을 안 옥황상제는 선비를 잡아와 백사슴을 만들고 백록담을 지키게 했다는 것이다. 도청에서 제공하는 자료에서는 효성이 지극한 나뭇꾼이 신선을 만난 곳이라고도 한다. 

내용으로 보면 나무꾼과 선녀 모티브를 수용한 백사슴의 유래담이라 할 만하며, 오히려 백록담의 유래에 어울리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 전설이 생명력을 갖기에는 어색한 점이 있다. 목욕장소가 백록담이면 타당성을 갖지만 방선문은 목욕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구춘화 시에서도 이곳에서는 신선의 말소리가 들리고 있고, 붉은 꽃잎이 아름다운 곳이어서 서왕모를 만나려면 이곳으로부터 위로 올라가 보라고 하고 있을 뿐 선녀의 목욕 내용은 없다. 

제주의 하천은 건천이다. 아무리 큰비가 와도 홍수가 나지 않는다. 그러니 홍수설화가 전승되기 어렵다. 나무가 많으니 나뭇꾼은 있겠지만 목욕할 수 있는 공간이 적합지 않아 나뭇꾼과 선녀 설화가 없다. 설사 전승된다고 해도 아이 셋을 낳을 때까지 선녀옷을 보여주지 말라는 금기가 전승되지 못한다. 전승민에게 합리성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육지에서는 아이를 가슴에 안고 물건은 머리에 이어 운반한다. 제주도에서는 구덕에 아이를 넣어 짊어질 수 있는 운반방법을 사용한다. 따라서 양팔에 아이를 안고 한 아이는 구덕에 넣어 짊어지면 운반이 가능하니까 나뭇꾼과 선녀 이야기의 전승이 타당성을 갖지 못한다.

'방선문'에 선녀 이야기가 고대로부터 전승되지 못한 이유도 이러한 민속문화의 차이에 있다. 가장 오랜 제주 관련 기록인 16세기 「남명소승」이나 관찬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 20세기 문헌인 「증보탐라지」에까지 없던 이야기가 오늘날 제주도에 전승되고 있음을 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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