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숙 제주도립미술관장·논설위원

영화관에서 영화가 끝나고나면 방금 상영을 마친 영화의 내용이나 만족도에 상관없이 가슴이 짠해지는 장면이 뒤를 잇는다. 엔딩 크레딧이다. 두시간 남짓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 함께 애쓴 이들의 숫자라니! 어떤 경우에는 너무 길어서 끝을 보지도 못한 채 상영관을 빠져나와야 할 정도다. 게다가 감독과 주연배우들에 묻혀 우리가 미처 생각지도 못한 시나리오, 미술, 음악, 분장 등 수많은 스텝과 도움을 준 이들이 있다는 걸 상기시켜줌으로서 영화가 종합예술이라는 것을 일깨워주기도 한다. 

영화처럼 미술에도 미디어아트나 설치미술 등 작가 혼자로는 작업이 어려운 경우가 생기면서 여럿이 함께하는 작품이 많아지는 추세다. 작가는 아이디어 스케치를 하고 이를 작품으로 구현하는 데는 테크니션과의 논의를 통해서 스텝들과 함께 완성해 가기도 한다.

1917년 마르셀뒤샹이 공장에서 이미 만들어진 변기를 미술관에 전시한 이후 미술작품은 작가의 머릿속에서 나오는 컨셉이 중요한 요소가 됐다. 작품제작에 참여한 인원이 몇십명일지라도 작가가 제작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완성된 작품은 오롯이 작가의 것이 된다. 

이렇게 볼 때 조영남씨 대작(代作)논란을 현대미술에 적용한다면 문제될 것이 없어보인다. 작년에 서울시립미술관의 지드래곤 전시 같은 경우 진짜 지드래곤이 제작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전혀 문제시하지 않았던 것만 봐도 그렇다. 그 경우는 스타의 명성을 안고 너무도 쉽게 주류미술에 입성한 점과 비싼 입장권으로 인해 상업성 논란이 있었다. 

조영남씨가 대작논란에 휩싸이는 이유는 현대미술에서 스텝을 두고 드러내서 작업하는 방식과는 달리 암암리에 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표현방식도 특수한 기술을 요하는 경우나 굳이 작가의 손이 가지 않아도 작품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일부과정에 적용한 것이 아니라 아예 작품전체를 베끼게 했다는 것이다.

그 부분에서 조영남씨는 "일종의 판화개념으로서…"라고 언급해 판화를 복제의 수단으로만 본다며 한국현대판화가협회에서 성명서를 내기까지 했다. 조영남씨가 똑같은 그림을 얻고자 했다면 회화를 대작시켜 베끼게 할 것이 아니라 아예 공방에 판화로 맡기면 됐을 일이다.

그랬을 때 그의 컨셉인 팝아트로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확장성을 가질 것이 아닌가! 팝아트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앤디 워홀이 마릴린 몬로와 모택동을 실크스크린으로 복제해 내듯이 말이다. 또한 '대작은 미술계의 관행'이라고 했다가 묵묵히 혼자 작업하는 작가들과 그림은 오롯이 작가가 그리는 것으로 알고있는 일반인들의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조영남씨의 작업방식과 그에 대응하는 발언으로 인한 이번 논란은 조영남이라는 한 아트테이너의 작업방식에 대한 도덕성 문제로 끝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대작관행에 대해서 그동안 우리가 놓치고 있던 부분들이나 개선돼야 할 것들은 짚고 넘어가야되지 않을까? 이를테면 지금까지 대작이 관행으로 돼왔다면 작품에 참여한 이들을 작품 크레딧에 명기를 하게 하고, 작품가의 일정부분을 댓가를 지불하는 방식 등 한 명의 작가 뒤에 숨은 사람을 밝은 곳으로 드러내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 깨알같은 이름자 하나하나는 영화속에 드러나지 않는 수많은 이들의 땀방울에 대한 보상이기도 하다. 영화에도 크레딧이 애초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시대의 요구에 따라 생겨났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착됐다. 최근의 미술계 대작, 위작논란은 미술계의 안좋은 관행이나 암적인 요소들에 대한 변화의 시발점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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