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주 봉성교회 목사·논설위원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미래라이프 대학을 새로 설립하려는 시도가 좌절된 것이 여름을 뜨겁게 달구던 뉴스 중 하나였다. 대학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하고 바로 직업전선에 뛰어들었던 여성들을 배려한다는 취지는 바로 좌초됐다. 

이대의 학생들과 졸업생들의 집단이기주의가 학교 경영자들의 선택을 가로막고 되돌린 셈이다. 

어느 영화의 대사 '나, 이대 나온 여자야'라는 장면이 얼른 떠오른다.

현실에서는 이 집단의 파워가 더 잘 작동하는가 보다. 한국인이 있는 곳이면 그 최상층에 그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세계 어디이든지 한국인들의 진출과 더불어서 위력을 발휘한다.

그 영향권에서 벗어난 분야를 억지로 생각해본다면 독신제도를 고수하는 천주교와 불교 정도가 아닌지 싶다. 

재학생들에게 배부되는 녹색 수첩은, 졸업한 다음에는 빨간 수첩으로 바뀌어 결속력을 강화하는 상징이 된다. 육사 졸업생들이 공유하는 빨간색의 졸업반지와 비슷한 자부심의 소품이 된다. 여자대학교의 최선두 주자로서의 긍지를 누가 부정하거나 무시할 수 있으랴.    

보다 쉽게 이 대열에 합류하는 제도를 만든다면 위신의 추락으로 이어진다. 불우한 여성들에게 이대 동문이 될 기회를 제공한다는 명분보다는 그 명예를 지켜야만 한다는 절박감에서 뭉쳤다. 재학생들과 더불어서 졸업생들도. 그리고 훌륭하게 막아내었다.   

마땅한 권리인가, 아니면, 지나친 이기심인가? 이 모든 갈등과 충돌의 핵심에는 우리 교육과 입시제도의 모순이 도사리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연고를 따라 뭉치는 그 습성, 그 중에서도 묘한 것이 대학동문회라는 존재다. 분명 전근대적인 문화임에 분명하지만 좀체로 수그러들지 않고 재생산되고 확대된다.  

일터 찾기와 더불어 배우자를 선택하는 일 그리고 대학을 선택하는 일은 우리 사회에서 철저하게 시장의 논리를 따라 진행된다. 그리고 누구도 거스르지 못하는 위력을 발휘한다.

50년 전에는 중학입시가 결정적 관문으로 자리잡았다. 당시 흉한 문화현상으로 지목되던 치맛바람은 이제 대학입시를 넘어 군 복무와 입사에까지 그 영역을 확대 발전했다.  

모두가 교육분야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망국병이라고 지적하지만, 마땅한 대안을 내놓지 못한 채 많은 세월이 흐르고 있다.

입시제도는 부지런히 개편되지만 개혁을 주도하지 못한다. 뒤엉킨 이기심을 조정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부추기는 결과를 만들어 낸 경우가 많았다. 

고교졸업과 더불어 대학입시를 치르는 게 만국 공통의 과정일텐데 왜 우리나라는 이러한 질곡을 벗어나지 못하는가? 

마라톤으로 치면 10㎞ 래프타임이 최종 결과나 순위보다 더 가치 있다고 말하는 경기방식이다. 야구로 본다면 2회말 스코어가 게임 내내 중요한 정보라고 우대받고 그리고 경기가 끝난 이후에도 기억되는 이상한 종목이 아닌가? 이런 불합리한 제도를 고수해야 할까?

올림픽이 시작되자마자 우리 언론은 메달 수를 집계하고 순위를 매긴다. 그랬더니 일단 최선두에 우리나라가 서 있다고 계산된 모양이다. 그렇게 자화자찬하는 세계 1위가 무슨 가치가 있나?

올림픽의 메달로서 순위를 매기는 일은, 세계에서는 큰 의미가 없다. 메달의 색깔에 상관없이 모든 메달의 수를 합산하는 경우도 있다. 세계 정상급의 경기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모두 같은 가치가 있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은메달을 땄다고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리는 선수가 이번에도 나오지 않을까 염려된다. 십중팔구 우리 대표단 선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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