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오 제주문화원장 수필가

제주 장묘문화(葬墓文化)의 효시(嚆矢)는 약 570여년 전 1443년(세종 25년) 제26대 제주목사 겸 안무사로 도임(到任)한 바 있는 기건(奇虔) 목사 이야기로 시작이 된다. 그는 선정을 베푼 목사로서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미신을 타파했을 뿐만 아니라 감귤 식재를 장려하고 장묘문화를 권장하기도 했다.

음력 8월 초하루부터 보름 사이에 조상의 묘소를 찾아 풀을 깎고 주변도 깨끗이 정리해 조상의 은덕에 감사하는 배례를 벌초(伐草)라 하며, 경사가 있을 때 조상의 산소에 가서 무덤을 깨끗이 하고 제사를 지내는 일을 소분(掃墳)이라 한다.

성묘(省墓)는 조상의 산소를 찾아가 인사를 하고 산소를 돌보는 것으로 전묘(展墓), 성묘(拜墳), 설성묘(拜掃禮) 또는 상묘의(上墓儀)라고 하며 청명일(淸明日)을 전후해서 조상의 묘역에 떼를 입히거나 석물(石物)을 세워 치장하는 일을 사초(莎草)라 한다.

시대가 흘러도 변함없이 벌초는 후손들이 해야 할 의무이고 도리이기에 비가 오나 태풍이 불어도 이 기간 내에 조상의 묘를 찾아 벌초를 하려 한다.

'뿌리 없는 나무가 없고 조상 없는 자손이 없다' 우리 조상은 추석에 앞서 선조들의 묘소에 벌초를 해 왔다.

벌초 문화는 조상을 추모하고 공경해 숭배하는 정신과 자손된 도리로서 이를 시행하는 미풍양속이 결합된 풍속이다.

자신이 세상에 존재함은 부모로부터 태어났음을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때문에 나를 태어나게 한 조상을 숭배하는 정신으로 조상이 모셔져 있는 유택을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벌초해 묘소를 깨끗하게 정리정돈하고 참배하며 조상님의 명복을 빌고 감사드림은 참된 자손의 도리라 할 것이다.

내 조상에 대한 벌초, 성묘 등은 어떤 특정한 자손에게만 맡겨 둘 것이 아니라 자손 모두가 스스로 솔선해야 할 일이다. 살아계실 때 못한 효도를 사후에라도 실천하며 공경하는 것은 자손 된 우리 모두의 도리이며 의무라고 생각된다.

때문에 벌초를 하지 않고 소위 골총이 된 묘소를 볼 때마다 참담한 심정을 느끼곤 한다. 

벌초 때가 되면 할아버지께서 등지게 위 망태에 점심 도시락은 물론 낫, 호미자루, 숯돌 등을 챙겨 얹고 산길을 오를 때 힘들게 뒤따라 걸어가며 "벌초는 매해 음력 8월 초하루부터 8월15일(추석) 전에 해야 한다. 이때 잡초를 제거하지 않으면 각종 잡초씨앗이 번성하기 때문이다. 절기상 처서가 지나면 모든 잡초씨도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일이 생각난다. 

지금처럼 자가용이나 트럭 등 운송 차량이나 벌초 기계가 없었던 옛날에는 제주의 중산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조상 묘소를 찾아다니려면 몇 십리 길을 걸어가야 하고 며칠을 벌초 일에 매달려 했다. 

도벌초 또는 모둠벌초(각자 집안별로 벌초를 하다 문중에 있는 조상묘를 부계 8촌 관계 친척 모두가 찾아가서 묘를 정리하고 제를 지내는 것)를 할 때에는 도·내외는 물론 외국에 사는 친척들도 고향방문을 겸해서 참례하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이 행사만은 모든 문중에 불문율처럼 전해오고 있다. 

점차 도시화 되면서 생활이 바빠지고 벌초에 대한 개념도 변해가고 있지만 그래도 조상의 묘를 찾아 정성껏 돌보는 아름다운 풍속만은 두고두고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식게 안 헌 건 몰라도 벌초 안 헌 건 놈이 다 안다', '추석 때 오지 못해도 벌초는 하고 간다'라는 아름다운 제주속담이 있다.

벌초를 통해 조상의 음덕을 알아가는 자연스런 인성교육의 기회를 갖도록 해야 할 것이다. 

가족과 친족 간의 우애도 다지며 다가오는 한가위를 즐거운 마음으로 맞이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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