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문철 전 제주도교육청 교육정책국장·논설위원

나이가 들어갈수록 피부가 날로 거칠어져만 간다. 아직은 채 여름의 뒷자락이 걷히지 않았는데도 내 피부엔 어느새 가을이 슬그머니 내려앉았다. 벌써부터 예전 같지가 않다. 이만하기도 아직이니까 하지, 앞으론 그 정도가 점점 더해 갈 거란 생각에 이르니 괜스레 우울해진다. 얼굴의 잔주름이 점점 깊어져 가고 피부의 빛깔과 촉감이 변해가는 것이 자못 안타깝다. 그렇지만 정작 안타까운 것은 그보다는 시나브로 굳어지고 낡아져 가는 우리네 의식이다. 

몸이 늙어 늙는 게 아니라 맘이 늙어 늙는다. 무엇이든 새로운 것들에서 너무 멀어지지 않으려고 나름대로는 마음 쓴다 하나 그게 그리 녹록한 게 아니다. 

한 친구는 날더러 순천자(順天者)는 흥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한다는 옛 성현의 말씀을 들먹이며, 그저 강물이 흐르듯 자연스레 한세상 살다 가면 될 것을, 뭬가 그리 아쉬워 안달이냐며 점잖이 너스레를 떤다. 그 말이 이때 쓸 말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것도 방법이요 옳은 말이다. 다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목가적(牧歌的)인 생각과 생활양식을 선호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럴진대 일선에서 물러난 지 상당한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현역 때 못잖게, 아니 어쩌면 한결 더 바쁘게 살아가는 몇몇 내 이웃들을 어떻게 이해하랴. 그들은 솔직히 그토록 바쁜 나날을 내심 즐기거나 심지어는 불러들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 어차피 사는 모양이 다들 하나같지 않고 이래저래 다양한 게 인생이라니.

아내와 함께 잠시 먼 나들이를 하고 엊그제 돌아왔다. 이번엔 하나의 테마를 카메라에 담아오기 위한 셀프투어 방식의 포토트레킹이었다. 각기 장단점이 있겠지만 셀프투어는 주도적 설계, 직접적 체험, 그리고 사색의 여유 면에서 패키지여행과는 다른 메리트가 있다. 여행의 목적이야 물론 따로 있었지만 그 밖에도 오가는 여정에 이곳저곳을 방문하고 경유하느라 얼마간씩 머무르는 가운데 너무나 다양한 상황을 오감(五感)으로 맞닥뜨려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 일마다 자연스레 피어오르는 생각의 파노라마가 우리를 행복하게 해줬다. 이것은 행운이요 크나큰 선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이러한 것은 카메라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너무나 큰 소득인 셈이다. 

이끼 낀 내 자아와 새로운 생각의 도킹이야말로 우리의 몸과 마음의 세포를 다시 새롭게 하는 원자(原子)임이 틀림없으리라. 역시 우리의 의식을 리모델링하는 데는 여행만 한 게 없지 싶다.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문화양식이 존재한다. 인종과 역사와 전통이 다르고 언어와 풍습이 다르다. 게다가 사람들의 성격은 어쩌면 사람의 수효만큼이나 천차만별이다. 계제(階除)가 이러함에도 우리는 고작해야 자신의 그 좁디좁은 사유(思惟)와 경험의 카테고리 안에서 모든 가치와 상황을 판단하고 재단(裁斷)하려 들기 일쑤다.

그렇다면 이렇듯 다양한 상황에 대응하는 비교적 합리적인 사고(思考)는 과연 무엇일까. 아마도 경직되지 않고 탄력있는 열린 마음, 곧 유연한 사고이리라.

예컨대 수도꼭지의 종류만 해도 너무나 다양하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보편과 객관'의 의미를 다시 음미해본다. 사실 거기엔 '생각의 평균'을 내려는 의도가 전제돼 있고, 그 과정 자체에 무리가 숨어들 개연성(蓋然性)이 짙게 깔려있어서 그것 또한 썩 내키지만은 않는다. 말하자면 하나의 통합적 가치를 도출해내기 위해 수많은 다양성의 요소들을 그 평균(average) 속에 함몰시켜야만하기 때문이다. 다양하다는 것은 그 자체가 팩트(fact)인 만큼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며 적절히 대응할 수만 있다면 사실 그게 정답이 아닐까. 물은 보편성과 객관성을 도출해내기 위해 평균을 강요하지 않고 있는 모두를 품어 안은 채 다양한 물굽이를 따라 골짜기를 흘러 대해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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