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언주 제주지방법원 부장판사

피고인석에 선 수의 차림의 소년은 이미 20여차례의 소년보호처분을 받은 후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음에도 그 집행유예 기간에 또다시 범행을 저질러 구속된 상태였다. 법정에서 다소 철없었던 소년은 뜻밖에도 여러 사건이 병합되느라 길어진 재판 동안 거의 매일 반성문을 내 앞으로 제출했다.

소년은 처음에 자신이 왜 판사에게 반성문을 써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썼으나, 곧이어 어린 자신이 제주까지 흘러들어오게 된 배경, 태어나서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었던 차기에 범행을 반복했던 스스로에 대한 후회 등을 솔직하게 써내려갔다.

판결선고 직전에는 내가 어떤 벌을 내리던 달게 받을 것이고, 자신의 죗값을 모두 치르고 나면 조금은 다른 삶을 살아보겠다는 결심까지도 썼다.

물론 소년에게는 다른 피고인들과 마찬가지로 형량을 줄여보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무엇이 소년을 이토록 성실하게 자신의 마음을 써내려가게끔 했던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어떤 '기대' 때문이었으리라.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던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신의 죗값과 자신에게 꼭 들어맞는 판결을 해달라는 재판장 그리고 법원을 향한 기대, 그리고 응당 그렇게 해줄 것이라는 믿음.

어린 소년범의 마음이 이와 같을진대, 법원을 대하는 우리 국민의 마음은 오죽하랴 하는 생각을 해본다. 심지어 국민이 바라는 바는 법관과 법원에 주어진 권한 범위를 능가하기도 한다.

기소권을 독점하는 검찰의 기소 없이는 어떠한 사람에 대해 형사재판도 할 수 없고 당사자들이 제출한 증거를 벗어난 어떠한 판단도 할 수 없건만 법원의 역할에 대한 국민적 기대는 이러한 법률적 한계를 아랑곳하지 않는다. 하늘도 알고 땅도 아는데 법관인 당신은 왜 모르냐는 어느 당사자의 외침은 결국 법관도 당사자가 제출하는 증거자료에 의해서 사건을 파악할 수밖에 없는 제3자적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조차 무시한다.

실제로 국민적 공분을 샀던 대형 참사가 터질 때 사건의 진상을 낱낱이 밝히고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죽어갔을 피해자의 사라져간 영혼을 달래며 책임 있는 자들이 제대로 처벌받기를 바랄 수 있는 곳을 우리는 법원 이외에 알지 못한다.

법원은 친딸을 성폭행한 인면수심의 아버지가 자신의 범행을 뉘우치고 벌을 받기를 바랄 수 있는 곳, 억울한 사기 피해를 당하였을 때 그 피해금액을 돌려받을 수 있도록 호소할 수 있는 곳, 행정청의 위법부당한 처분을 취소하여 달라고 청구할 수 있는 곳, 때로는 부부가 내밀한 갈등을 해결하지 못해 일방이 이혼을 원할 때 이혼을 명받고 미성년 자녀들의 양육방법을 정할 수 있는 곳이다. 때로는 가깝게 때로는 멀리서 국민의 삶에 관여하지만, 국민의 마음에서는 어쩌면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곳이기도 하기에 법원을 향한 국민의 기대와 신뢰는 이해받아 마땅하다.

결국 나는 소년에게 부정기형으로 징역형을 선고했고, 소년은 항소하지 않았다. 

출소하고 나면 반성문에서 결심했던 대로 부디 다른 삶을 살아달라는 재판부의 당부가 소년에게 닿았는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재판이 소년에게 그러한 하나의 계기가 됐기를 마음속으로 빌어본다.

9월13일은 대한민국법원의 날이다. 역사적으로는 대한민국이 일제에 빼앗겼던 사법주권을 회복해 대한민국의 독립된 사법부가 설립된 날이지만 적어도 오늘의 주권자인 국민은 우리 법원이 어떤 곳이고 어떠했으면 좋겠는지를 생각하고, 사법부 구성권은 국민이 원하는 법원이 어떤 곳이고 그러한 법원을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곱씹어보는 하나의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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