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봉 제주대 명예교수

한글날(10월9일)을 맞아 훈민정음 서문을 펴본다.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 이를 불쌍하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날로 씀에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이 서문을 읽어보면 소통이라는 '말의 길'을 염두에 둔 세종대왕의 뜻을 알 수 있다. 

'말의 길', 말(언어)의 기능은 의사전달에 있다. 의사전달이 원만하게 이뤄지기 위해서는 그 말에 대해서 듣는 사람과 말하는 사람 모두 알고 있어야 한다. 어느 한쪽이 잘 알지 못한다거나 모른다고 한다면 원만한 소통은 기대하기 어렵다. 말이 안되는 것이다.

일전에 어느 여대생의 '중도'라는 말로 해서 쓴웃음을 지었던 경험이 있다. 전화 통화 내용 가운데 "중도에서 만나"하는 한마디는 그 여대생의 고운 마음씨로 읽혔고, 그 여대생을 한 번 더 쳐다보게 만들었다. 

필자가 근무했던 제주대학교 인문대학은 정문에서 걸어서 15분가량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예전에는 '폭풍의 언덕'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던 단과대학이다. 

눈비가 내리는 궂은 날이면 '폭풍의 언덕'이라는 말이 실감 난다. 땡볕에 걸어서 올라가는 것도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다. 그러니 내가 여대생의 통화에서 짐작했던 바는 한 학생은 교문에서 인문대학으로 올라오는 중이고 "중도에서 만나"라고 말한 학생은 인문대학에서 내려가다 보면 그 중간 위치인 학생회관에서 만나게 되니 '중도에서 만나'라 했구나 하는 상상이었다. 

왜냐하면 인문대학과 정문의 중간 위치에는 학생회관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서점, 식당, 매점, 동아리방 등이 있으니 만남의 장소로는 그만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대화에서 "중도에서 만나"의 '중도'는 '중도(中途)'가 아니라 '중앙도서관'의 줄임말인 '중도(中圖)'였으니 필자의 상상은 여지없이 깨어짐과 동시에 고운 마음씨의 대학생도 사라져 버렸다. 말하는 사람은 중앙도서관의 줄임말로 '중도'를 쓴 데 반해 곁에서 엿들은 필자는 길의 중간인 '중도'이니 서로 '말의 길'이 막혀 소통이 안 된 것이다.

사람들은 '축협'이라는 말을 듣고 '축산업협동조합'을 연상하는 게 보통이지 '축구협회'를 떠올리지는 않는다. 이는 말하는 사람이나 말 듣는 사람 모두 '축협'은 '축산업협동조합'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서로 알고 있으매 '말의 길'이 트인 것이고 서로 이해하게 되니 오해가 없는 것이다. 여대생이 쓴 '중도'와 구닥다리인 필자가 받아들인 '중도'와는 그 성격이 사뭇 다르다.

말은 시간의 경과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또 시대가 변함에 따라 새로운 말을 만들어 써야 할 때가 많다. 변화는 언중(言衆)들의 지지를 얻으면 되지만 새로운 말을 만들 때는 말 만들기 원칙을 지켜야 한다. 개인의 기발함을 발휘할 일은 아니다. 일정한 테두리 안에 들어와 있어야 한다.

문법(文法)과 어법(語法)이 있으매 어문 규정을 지키고 그 원칙에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새롭게 만들더라도 규범이나 원리에 맞게 만들어 써야 한다. 그래야만 말하는 사람과 말 듣는 사람 모두 공유할 수 있다. 공유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말(언어)로서 그 가치를 발휘하게 된다.

말은 그 말을 쓰는 사람의 정신이고 마음이고 문화의 표상이다. 우리들의 정신과 마음 그리고 우리 문화를 선양하려면 언중들 사이의 '말의 길'은 잘 닦여져 막힘이 없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은 우리말과 글을 아끼고 사랑해야 하니 570돌 한글날을 맞아 마음 다짐을 새롭게 하고 '우리말의 길'을 닦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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