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영 조세정의네트워크 동북아챕터 대표, 논설위원

"정말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나서서 다 같이 도와준다" 2015년 5월5일 제 93회 어린이날을 맞아 청와대에서 열린 '어린이날 꿈 나들이' 행사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이 초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발언이다. 이는 'When you want something, all the universe conspires in helping you to achieve it'으로 파울로 코엘류의 소설 「연금술사」(The Alchemist) 영문판 22 페이지에 등장하는 한 신비스런 노인의 발언이다.

살렘 왕(the King of Salem)을 자처하는 이 정체불명의 노인의 말에 따라 안달루시아 지방의 이름 없는 목동에 불과했던 산티아고는 자신의 꿈과 운명(Personal Legend)을 찾아 구도의 길에 나선다.

브라질 작가 코엘류가 1988년 모국어인 포르투갈어로 쓴 「연금술사」는 현존하는 작가가 낸 책 가운데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된 것으로 공식 인정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7000만부 가량 팔린 그야 말로 베스트셀러 중의 베스트셀러다. 필자 역시 무척 아끼는 소설로 장거리 여행이나 휴식 때마다 펼쳐 보곤 한다. 그런데 「연금술사」는 한마디로 신비주의 색채가 농후한 성인용 동화라 평하고 싶다. 일상과 현질서를 벗어나 잠시 다른 세상을 꿈꾸며 머리를 식힐 때 쉽게 손길이 간다. 다시 말하자면 국가 최고 지도자가 자신의 집무처로 초대한 초등학생 어린이에게 들려줄 경구의 기본 텍스트로 삼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작품이다.

박 대통령의 어법과 내용을 두고 세간에서는 '유체 이탈 화법'이라 평하곤 한다. 코엘류가 공개한 소설들은 정확히 '유체 이탈' 상황을 배경으로 삼고 주제 의식으로 추구하기 때문에, 어찌보면 박 대통령의 코엘류 인용 행위는 맥락이 맞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박 대통령의 유체 이탈 정황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를 상기해 보자. 2015년 1월12일 '신년구상' 기자회견 자리에서 벌어진 일이다.

불통의 리더십을 우려하는 지적에 대해 대통령은 대면 보고보다는 전화 한 통으로 빨리빨리 해야 될 때가 더 편리할 때가 있다면서 배석한 장관들을 향해 "그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라고 천연덕스러운 질문을 던진다. 마치 황송하다는듯 고개를 주억거리던 장관들은 멋쩍은 웃음으로 대통령의 길이 옳다는 무언의 태도를 보였다. 「연금술사」에서 산티아고는 바람과 별빛 등 자연의 기운과 계시로부터 영감을 얻는다. 최순실 사태로 드러나는 정황을 보자면 박 대통령의 소통·통찰 방식은 픽션에 등장하는 소년 목동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남북 대치와 미중일 간의 각축, 그리고 위기로 치닫는 경제 상황을 감안하면, 일개 소설에 등장하는 캐릭터와 유사한 리더십은 번지수가 틀려도 한참 틀린 것이다.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 13일 동안 케네디 행정부가 치른 격한 내부 논전 상황은 음성 녹음 테이프로 고스란히 후대에 남겨져 있다.

국가안전보장회의 석상에서 오간 실로 영화보다 더 극적이고 목숨을 건 싸움보다 더 위중한 대화를 보면, 위기를 맞은 리더십이 보여야 할 모범적 면모를 맛 볼 수 있다. 물론 박 대통령의 리더십과 그가 이끈 청와대 및 행정부는 여기에 빗대기에는 부끄러운 정도다.

언론 및 정치권 주변의 여론 주도층도 박 대통령의 심기를 살피거나 옷차림 등에 의미를 부여하기에 바빴다. 박정희 시대의 향수에 젖어 그의 딸 대통령에 마치 최면 걸린 듯 편애를 보여온 시민들도 상당수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선대의 박 대통령이 남긴 '공포의 통치'(reign of terror) 그림자가 발전적으로 극복되기는 커녕 '공백의 통치'(reign of null)라는 단기적으로 극복하기 힘든 상흔을 한국 사회에 남기는 것으로 종지부를 찍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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