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대성 전 제주도의회 의장

아침에 눈을 뜨면 습관처럼  베란다 창밖에 서있는 산 딸 나무에 시선이 머문다.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봄이 오면 앙상한 가지에 힘찬 생명의 싹을 틔우고, 봄의 절정에 달하면서 하얀 꽃이 눈부시다. 여름의 무성한 성장으로 강렬한 태양빛을 가려준다. 가을이 오면 노랗고 빨간 열매가 동네 새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베푼다.  그러는 가운데 차분히 옷을 가라 입으며  또다시 찾아올 모진 겨울을 맞이할 차비를 한다. 나는 이 산 딸 나무에서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우주 섭리를 경외하며 잠시 인생을 생각해 본다. 

문득 임진왜란 때 승려요 승군 장이신 서산대사께서 85세로 열반에 드시기 직전 읊은 해탈의 시 구절이 떠오른다. '삶이란 한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요(生也一片 浮雲起), 죽음이란 한조각 구름이 스러짐이다(死也一片 浮雲滅), 구름은 본시 실체가 없는 것 (浮雲自體 本無實) 살고 죽고 오고 감이 모두 그와 같도다.( 生死去來 亦如然)'

도대체 인생이란 무엇이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어떻게 사는 것이 참이며 보람 있는 삶인가.  누구나 아침에 눈을 뜨면 문득 품어보는 의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종교나 성인들의 가르침은 왜 사느냐고 묻지 말고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에 대해서 가르침을 주신다. 그 이유는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행복한 삶과 불행한 삶이 갈리기 때문이 아닐까. 일반 마라톤의 이정표는 42만195㎞로 출발점과 종착점이 명확하다. 그러나 인생 이정표 2만9200㎞(평균 수명 80세×365일-필자의 자의적인 생각)의 정확한 종착점과 도착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인생 후반이 깊어 갈수록 초조와 불안이 커지며 여기에는 귀천 구별 없이 평등하다.

희·노·애·락으로 이어지는 이정표의 절반을 넘어선 인생이 평소에 지나쳤던 종교, 즉 교회나 사찰의 문을 두드리는 이유는 황혼이 가까워질수록  생에 대한 애착, 사별, 사후의 미지세계에 대한  불안 등 죽음의 공포를 현실로 체감하며 이를 떨쳐버리고자 하는 몸부림일 것이다. 

인생은 하루하루가 만남과 헤어짐, 위기와 기회, 기쁨과 슬픔, 감사와 아쉬움,  회한이 수시로 교차하는 시간의 연속이다.  우선은 아침에 눈을 뜨면 건강하게 살아 있다는 것, 내 스스로 새끼 밥을 먹고 내 두 다리로 길을 걸으며 아들 딸 손자들의 자람을 지켜 볼 수 있는 것에 안도하고 감사한다. 그러나 불안도 그에 못지않다.  지금도 나는 이 시대 이 사회에 필요한 사람이며 내 스스로 나를 언제까지 지탱 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가장 가까운 지인에 의해서 강제로 정신병원이나 요양보호소로 보내지게 되지나  않을까.

또한 끝없는 욕망도 때로는 거추장스러운 걸림돌이 돼 괴롭힌다. 사자는 배가 부르면 사냥을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인간은 배가 불러도 사냥을 멈출 줄 모른다. 이 끝없는 탐욕이 발전의 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파멸로 이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생은 바람처럼 구름처럼 신기루 같은 존재이지만 근본은 마음인 것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_라 했듯이 마음먹기에 따라 선악이 갈리고 희망과 절망이 따르기 때문이다. 마음이 바르지 못한 사람이 돈이나 권력을 잡으면 상식과 정의가 무너진 분노의 사회,  급기야 국가기본까지도 흔들린다는 사실을 온 국민은 지금 가슴 아프게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적 신체적 노화는 현대 의학으로도 도리가 없는가보다. 그렇다면 그 노화를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달관의 여유를 가져야한다. 남의 탓 세상 탓 할 것이 아니라 살아온 인생 살아갈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는 성숙한 시민의식을 정립해 나가야한다.

이 시대를 호흡하는 우리는 미우나 고우나 형제요, 자매며 이웃이다.  소통과 이해 배려와 협력이 아름다운 동행이요 행복이다. 행즉안항(行則雁行)의 기러기 떼처럼 나란히 함께 가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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