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국장대우 문화부

'상실의 시대'다. 말 그대로 하 수상한 시절에 나라를 뒤집고도 모자란 것들에 목소리를 높여본다. 어찌해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는다. 우울하다기 보다 어딘지 진득한 미안함, 그보다 더 힘든 감정이다. 애써 무시하던 허무감이 불쑥 고개를 쳐든다. 우연히 들은 "우리가 이래도 되는가 모르겠다"는 자조 섞인 한마디가 바닥을 알 수 없는 상실감을 만든다.

'어른'들의 빈자리 얘기다. 흔히 인용되는 아프리카 속담처럼  '노인 한 명이 죽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는 말이 현실이 되고 있다. 먼저 세상을 살았다는 의미를 넘어섰으니 도서관 보다는 '제주'라는 큰 그림의 한 페이지가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난달말 원로 민속학자인 현용준 전 제주대 명예교수가 세상을 떠났다. 바로 '제주학 1세대들의 부재'에 대한 안타까움이 이어졌다. 현 전 명예교수는 제주도 민속·무속·신화 연구에 평생을 바쳐왔다. 제주무속을 심층 연구해 정리한 20여권의 저술은 이후 관련 연구를 하는 이들의 지침서가 되고 있다. 제주도 신화와 전설, 민담 등을 채록하고 보급하는데 평생을 바쳐왔던 '어른'이다. 제주의 첫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 대표목록인 '칠머리당영등굿'을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75호 지정받게 하는데도 일조했다.

지난해는 1960년대부터 해녀 연구를 하며 많은 자료를 구축한 강대원 선생을 잃었다. 

그 이전 제주민요와 해녀 연구에 정진해온 김영돈 제주대 교수와 제주 방언 연구를 집대성하며 제주학 정립의 초석을 다졌던 현평효 초대 제주대 총장 등 2000년 이후 제주학 1세대들이 차례로 하늘 소풍을 떠났다. 김영돈 교수가 남긴 「제주의 해녀」(1996)·「한국의 해녀」(1999)는 아직까지도 대표적인 해녀 통사 자료집으로 인정받고 있다. 최근 필요성이 부각되고 있는 제주어사전의 첫 결과물은 1995년 현 전 총장이 주도했다.

뒤를 잇는 작업들은 있었다. 강영봉 제주대 명예교수가 올해 제주어연구소의 문을 열며 '다음'의 기치를 올렸다. 제주민요나 무속, 신화, 해녀까지 연구자들이 이어졌으니 '제주학'의 정통성만큼은 지키고 있다. 아쉬운 것은 그들에 대한 인정이다. 평생을 바친 그들의 노력이 있어 지금의 제주와 제주학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지만 그들에 대한 평가 작업은 오로지 학문적 영역 안에 머물고 있다. 이대로라면 다음 세대에 이들의 노력을 기억하게 할 방법이 있을지 의문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런 상황들이 해녀문화를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대표목록으로 등재하고, 제주학을 바탕으로 한 문화예술의 섬을 추진하는 가운데 만들어졌다는데 있다.

과거에서부터 오늘, 그리고 미래에 이르기까지 제주 정체성을 경쟁력으로 삼겠다는 계획이지만 어딘가 중요한 것이 빠졌다는 지적이 다시 제기되는 부분이다. 해녀문화에서 공동체성과 민속지식의 전파가 이뤄졌다는 자료를 미리 구축한 이들이 없었다면, 제주어의 중요성을 미리 알고 조사·연구를 하지 않았다면, '무속신앙'이란 이름으로 무시되던 것들에 먼저 귀를 기울인 이들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가 '제주 문화'가 부를 수 있는 것이 남아있기는 할까 하는 반성이 필요하다.

그래서 '상실의 시대'다. 돌아보면 한 해 정신없이 진행된 문화예술의 섬 도민 대토론회에서는 '어떻게 할 것인지' 방향만 물었을 뿐 '무엇을 채울 것인지'는 챙기지 못했다. 올해 시대적 요구에 부흥한 연구와 대중화를 내건 제주학연구센터의 활동 중 제주학 선구자들에 대한 자료의 집적과 아카이브화(기록 보관)는 더딘 상황이다. 그렇다고 '잘못했다'고 지적하지는 않겠다. 그보다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는 얘기를 하고 싶다. 행여 잊을라치면 서로 콕콕 옆구리라도 찔러보자고 하고 싶다. 어디를 돌아봐도 '상실의 시대'에 적어도 뭔가 채워봤다는 시도가 절실하다. 바닥이 단단하지 않으면 구중궁궐도 무너진다.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