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크게는 거대한 금수의 공격은 물론,작게는 페스트와 같은
 보이지 않는 세균의 공격과 대결도 해야 했다.그러나 그 어떤 
외부의 공격도 인간을 결합시켰을 망정,분열시키지는 못했다.정작 
우리를 분열시킨 것은 외부의 공격이 아니라,인간 내부의 어떤 믿
음 때문이었다.

 오래 전에 인간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종교의 차이 때문에 피를 
흘려야 했다.유럽에서는 30년 전쟁이 이어졌고,동양에서도 참혹한
 박해가 잇따랐다.서로의 신앙과 종교가 바이러스로밖에 보이지 않
았기 때문이다.거슬러 올라가면,소크라테스도 아테네 시민과는 다른
 신을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고발을 당해야 했으며,그 때문에 사
약을 들어야 했다.종교분쟁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으나,중세와 같은
 종교재판은 목격되지 않는다.

 또한 얼마 전까지 우리는 이데올로기의 차이 때문에 반세기에 걸
친 대결을 벌여야 했다.이 이데올로기 역시 서로를 박멸해야 할 
어떤 바이러스 같은 것으로밖에 간주하지 않았다.민족과 국가를 갈
라놓고,때로는 인간과 인간을 갈라놓았던 이 이데올로기도 이제는 
세력을 상실한 세균처럼 형해화되었다.

 이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것을 한때는 모든 것인 양 착각했던 역
사가 존재한다.의회민주주의의 종주국인 영국도 오래 전에 편협한 
종교문제 때문에 곤란을 겪은 나라였다.그래서 영국의 어느 철학자
는 그런 편협한 정신이 영국의 비참함과 혼란의 주요 원인이라고 
비판한 적이 있었다.그는 인간의 무지와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
독선과 광신’을 가장 증오했으며,때문에 ·관용·의 미덕이 평화의
 기초임을 강조했다.

 종교문제만이 아니라 우리는 온갖 신념과 주장에 대해서도 같은 
비판을 할 수 있을 것이다.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완악함이 페스트
와 같은 세균도 분열시키지 못했던 우리를 분열시켜왔기 때문이다.
얼마 전 교황은 “어떤 종교에나 진리의 씨앗은 있다”라는 의미심
장한 말을 남겼다.자기 믿음만이 최고선이라고 주장하는 무리를 제
외한다면,이 선언은 많은 사람의 동감을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다.
말을 바꾼다면, “어떤 신념이나 주장에도 진리의 씨앗은 있다”는
 함의를 담고 있는 셈이다.그래서 어느 철학자도 “이슬람의 코란
이 이 세상의 모든 진실을 담고 있다면,세상에는 코란을 제외한 
어떤 책도 필요 없지 않은가?”라고 질타한 적이 있었다.

 진리를 독점하는 신념이나 주장은 존재하지 않는다.오로지 경청할
 가치가 있는 ‘진리의 씨앗’을 담고 있는 신념과 주장들이 있을
 뿐이다.그러나 우리의 일상생활이나 정치판,토론장을 막론하고 어
디서나 ‘진리의 독점가(?)’를 자처하는 무리들이 있다.때로는 
여론을 앞세우고 때로는 조작된 공청회를 통하여 ‘진리의 씨앗’을
 압살코자 했으며,때문에 분열과 대결은 멈추지 않았다.토론이 필
요한 자와 징벌이 필요한 자는 서야할 곳이 다른 법이다.

 그럼에도 ‘진리의 독점가’들은 ‘진리의 씨앗’을 심판대 위에 
세우고 싶어했으며,결국 신념에 대한 토론이 있기 전에 사람에 대
한 징벌이 난무할 수밖에 없었다.제주도 개발문제를 포함한 우리의
 현안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모든 이슈에 대한 최선의 결론은
 ‘진리의 씨앗’을 인정하는 ‘관용’이 상호 공유되었을 때 가능
하다.

 관용이 먼저 하면 분열과 대결이 사라지고,분열과 대결이 사라지
면 그후에 우리는 사회화합이라는 열매를 딸 수 있기 때문이다.그
러나 예전에도 그랬듯이,관용이 죽으면 그 다음에는 우리가 죽어갈
 것이다.〈이규배·탐라대 교수·일본학〉<<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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