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대림 서귀포의료원장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면서 집을 나선 후 걷기 운동을 위해 고근산으로 향했다. 마침 구름이 많이 껴서 춥거나 덥지도 않고 바람마저 솔솔 불어 걸음걸이가 한결 가볍게 느껴진다. 웃자란 오솔길의 풀들은 얼마 전에 짧게 잘려서 시원스럽다. 산길을 걷노라니 '길'에 대한 여러 생각들이 밀물처럼 솟아올랐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대학 입시 때 '길'이라는 제목으로 수필을 쓰라는 문제가 나왔었다. 그 당시 길지 않았던 인생에 대한 경험과 아직 걷지 않은 길에 대한 기대감으로 충만한 내용의 글을 마구 써댔었다. 그 덕분인지 그 대학교에 합격해 또 하나의 새로운 길을 걷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또 '길'하면 교과서에서 배운 프로스트의 '가지 않는 길'이라는 시가 언뜻 떠오른다. 미련이 남는 안타까운 길의 선택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 우리를 슬프게도 하며, 심지어는 우리의 일생을 바꾸기조차 한다.

최희준의 유행가 '길'은 한 평생을 살아온 한 남자가 담담하게 살아온 자신의 길을 돌아보는 여유로운 길이고, 한 동안 텔레비전 연속극 주제가로 인기리에 불렸던 기억이 난다. 안소니 퀸이 주인공을 맡아 열연했던 영화 '라스트라다(길)'는 영화 못지않게 배경음악이 유명했다. 당시 힘들게 삶을 영위하는 여러 장면들이 음악과 함께 주마등처럼 스친다.

해변의 모래를 움켜쥔 채 누워서 울고 있는 불행한 주인공 참파노의 모습을 비추면서 서서히 멀어져가는 마지막 장면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미소라 히바리의 '강물의 흐름처럼'이라는 서정적인 엔카가 있다. 산다는 것은 여행하는 것과 같고, 울퉁불퉁한 험한 길을 지도조차 없이 살아온 그녀의 고단한 인생길이었으며, 사랑하는 이의 품에 내 한 몸을 맡기고 싶다는 대목에서는 사뭇 감동적이다. 

인간은 늘 길 위에서 서성인다고 한다.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어느 쪽인가를 판단해 선택하여야 하는 한편으로는 즐겁기도 하겠지만 달리 보면 괴롭기도 하다. 인생의 과정을 일렬로 늘어놓는다면 굴곡져서 가녀린 부분도, 직선적인 탄탄대로도 있을 것이다.

한 개의 점에서 출발하여 한 개의 점으로 마감한다는 점만은 누구에게나 공통적일 것이라 여겨진다. 인생의 곡선이 각기 다른 것처럼 결국에는 우리의 삶이란 수많은 길들이 서로 얽히고설키면서 만들어지게 되는 셈이다.

한 인간이 걸어온 자기 일생의 길을 어떻게 평가하고 어떻게 해석할 지는 아무런 기준은 없는 것이다. 지구라는 같은 공간에 평생을 살면서도 아무런 관련이 없는 곡선들도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삶과 닿은 좋은 인연의 선들을 돌보고 배려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일은 없을 것이다. 인간의 활동 영역이 아무리 넓다 해도 직접 마주하고 부딪치며 살아가는 사람의 숫자는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인생이란 길을 걸으면서 늘 사색하고 자신의 삶을 가끔씩 돌아보고, 이웃과 함께 삶의 기쁨, 즐거움과 슬픔을 공유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할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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