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문철 전 제주도교육청 교육정책국장, 논설위원

인간은 정녕 어디까지 추해질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그가 지닌 욕망의 끝자락까지다. 그러니까 한 인간을 추락하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욕망이다. 당사자들이라고 그걸 모를까만, 최후의 순간까지도 인정하고 뉘우치려 들지 않는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탁류에 떠내려가며 머리가 수면 아래로 완전히 잠기는 순간까지도 도대체 후회나 뉘우침이란 걸 모르니 말이다. 운명의 신은 떠내려가는 동안 그나마 몇 군데의 기댈만한 모퉁이를 마련해뒀지만, 그것을 천우신조로 알고 회심의 기제(機制)로 삼기보다는 되레 그의 뚝심을 더욱 강화시킬 뿐이다. 심지어 이 고집불통의 그릇된 심사(心思)를 소신이라는 이름으로 미화시키기까지 한다. 이렇게 해서 도달한 추락의 종착지, 그곳은 나락(奈落)이다.

욕망에는 생명(live)과 멸망(evil)이라는 상반된 두 얼굴이 언제나 서로 마주 한다. 욕망은 희망이요 삶의 에너지원이기에, 욕망이 없는 인간은 죽은 인간이다. 한편 욕망의 또 다른 얼굴, 즉 헛된 욕망은 때로 한 인간을 죽음의 나락으로 내몰고 만다. 그것을 소유하고 운용하는 사람에 따라 욕망의 얼굴은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함량을 감안해 욕망의 텃밭을 잘 가꿔나가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이러한 것을 과대평가하거나 간과한 채로 무모하게 일을 벌이다 큰 낭패를 보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욕망이란 소유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실제적인 운용의 묘에 참 가치와 효용이 있다 하겠다. 그에 따른 판단과 선택은 오직 자기만의 몫이리라. 사르트르(J.P.Sartre)의 말마따나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존재다. 그가 어떤 길을 가든 그것은 자유다. 그러나 그 선택에 책임은 져야한다'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인간, 그는 과연 어떤 존재일까. 성서는 우리에게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자기 마음을 지켜야 한다'고 교훈한다. 아마도 자기의 선택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라면 제 마음을 굳건히 지켜낼 수 있는 심지가 굳은 사람이며 진실한 사람이리라. 어찌 보면 자기 마음을 지키는 사람, 자기 선택에 책임을 지는 사람, 그리고 말에나 일에나 늘 진실한 사람 등은 서로 다른 세 사람이 아니라 어쩌면 딴이름의 한사람일는지 모른다. 분에 넘치도록 권한을 휘둘러놓고도 정작 책임 질 대목에선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교묘히 비켜가기에 혈안이 되는 일단의 군상들을 볼 때면 그들의 인생이 차라리 측은하기까지 하다. 

그밖에 우리를 미혹케 하기 쉬운 것 중에는 권위란 것도 있다. 권위란 높은 지위에서 저절로 얻어지는 게 아니라, 애오라지 고매한 인격과 올곧은 삶이 빚어내는 향기다. 때로 지위가 권위를 형성하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그것은 본질이 아니다. 모든 사물에는 저마다 격(格·class)이 있고 수준(水準·level)이 있다. 이것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혹자는 인간 평등론을 들먹이며 반론을 펴리라. 그렇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그러나 생명의 가치가 평등하다는 것이지 인격마저 평등하다는 것은 아니다. 생명은 골고루 주어진 천부적(天賦的) 선물이지마는 인격은 어디까지나 자위적(自爲的) 노력의 산물이다. 따라서 그 정도의 차를 말할 때 인간을 대상으로는 인격(人格), 사물을 대상으로는 품격(品格)이라 하는 것이다. 

인격은 대개 저마다 고유한 향기를 발한다. 따라서 벌 나비가 그러하듯 인간도 저마다 풍기는 향내를 따라 멀리서 가까이서 벗들이 모여든다. 그러기에 공자3낙(孔子三樂)에도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有朋 自願方來 不亦樂乎)'를 두 번째의 큰 즐거움으로 삼았었나 보다. 탐욕스런 해충이 득실거려 좀체 뿌리내리기 힘든 박토엔 예쁜 꽃들이 피지 않고, 딱딱한 권위의 암반 위의 정원엔 아름다운 벌 나비가 날아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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