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병찬 서예가·논설위원

혼란이 거듭되던 병신년도 다 저물어가고 새 희망이 불꽃처럼 피어날 정유년을 맞이해 묵향이 가득한 묵수재에서 새로운 창작의 꿈을 안고 아침 창을 열련다. 밝은 창 아래 정돈된 책상 앞에 단정히 앉아 천천히 먹을 갈고 있노라면 맑은 묵향(墨香)이 방안에 서리며 흩어졌던 마음이 가다듬어 진다.  그것은 바로 정중동(靜中動)의 극치로 우리의 정신력을 집중, 강화시키는 생활의 구심원리를 찾게 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서예는 우리의 마음속에 깊은 양식으로 자리를 같이하고 있는 것이다.

서예는 그 사람을 표현한다고 했다. 글씨를 보면 그 사람의 인품과 교양을 짐작할 수 있다. 서예 한 폭도 걸려있지 않은 집에는 향기 없는 꽃과 같아서 삭막하다. 생활에 좌우명이 되고 인생의 지표가 될 수 있는 주옥같은 글귀라든가, 인생에의 풍류를 즐기고 생활의 멋을 노래한 시구(詩句)를 운치 있게 써서 걸어놓고 집에 들어올 때나 나갈 때 그 내용도 음미하고 글씨도 감상하는 멋은 서예만이 만들어 주는 고매한 분위기일 것이다.  또한 각고면려(刻苦勉勵) 끝에 좋은 글씨를 써서 친지나 후손들에게 전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보람 있고 뜻이 깊은 일이겠는가!
우리가 생활하는데 취미처럼 즐거운 것이 없다. 우리에게 가장 여유 있고, 흐뭇하고, 보람됨을 주는 것은 취미일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생활과 취미가 혼연 일체하는 사람이다.

바쁜 생활 속에서 동분서주하며 메마른 생활이 연속될수록 우리는 정신의 안식처가 되고 기쁨의 샘터가 되는 취미를 가져야 한다. 내가 갖고 싶은 취미, 남에게 권하고 싶은 취미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서예처럼 우아하고 고상한 취미는 없을 것이다. 조용히 책상 앞에 앉아서 먹 냄새를 맡으며 하얀 화선지 위에 명인(名人)의 서첩을 본받아 한자 한자 쓰고 있노라면 옛 성현의 말씀을 직접 듣고 있는 듯이 저절로 즐겁고 흐뭇해진다. 안병욱 교수의 말씀을 빌린다면 "먹을 가는 것은 곧 자기의 인격을 아름답게 가는 것이요, 글씨를 쓰는 것은 자기의 인생을 정성스럽게 쓰는 것이며, 붓을 깨끗이 씻는 것은 우리의 때 묻은 마음을 정결하게 씻는 것이다"라고 했듯이 서예는 세심정혼(洗心精魂)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

서예 속에는 인생의 깊은 길이 있고 높은 진실이 깃들어 있다. 서예에는 자기성찰의 기쁨이 있고 정신통일의 기틀이 있고 인격수양의 의미가 있고 정서순화의 즐거움이 있고 개성표현의 보람이 있고 가치창조의 행복이 있다고 했듯이 서예는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살찌우게 하는 생활 속의 예술이다.

자주 쓰는 말에 '심전경작'(心田耕作)이란 구절이 있다. 마음의 밭을 간다는 뜻이다. 우리는 마음의 밭을 아름답고 풍성하고 윤택하게 갈아야 한다. 마음의 밭에서 푸른빛이 나고 맑은 향기가 풍기고 윤기가 흐르는 생활을 해야 한다.

우리가 각자의  자기생활에서 스스로 심전경작을 하는 길이 있다면 여기에는 서예를 통한 경작이 제일일 것이다. 서예는 혼자서 유유자적(悠悠自適)즐길 수 있어서 좋고 언제 어디서나 쉽게 즐길 수 있어서 좋고 경제적으로 큰 비용이 들지 않아서 좋은 것이어서 취미중의 취미, 고상하고 우아하고 유현한 취미, 정신수양(精神修養)의 취미로서 누구나 쉽게 접근 할 수 있다. 명고첩(名古帖)이나 좋은 체첩을 보면서 한 점 한 획을 소홀히 하지 않고 써내려가노라면 저절로 정신이 통일되고 정서가 순화될 것이다. 심정 즉 필정(心正則筆正)이란 말이 있다. 이는 마음이 바르고 곧아야 글씨도 옳게 씌여진다는 것이다.

붓을 잡는 것은 곧 마음을 잡는 것이요, 획을 바로 긋는 것은 곧 마음을 바로 긋는 것이다. 붓을 곧추세우고 한 점, 한 획 힘차게 쓰는 기본수련 속에 마음의 수양을 쌓아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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