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홍석 전 동국대교수 겸 학장·논설위원

미국교포 교수로서 명성을 알려온 이정면 박사가 있다. 그는 미국 3대 명문인 미시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유타대학 교수로서 오랫동안 재직해왔다. 집안에는 5명의 박사를 배출함으로써 한민족의 자부심을 보여 온 위치에 있다. 그 중에는 미시간대학에 둘이나 가산점(incentive)을 받고 입학하게 됐음으로 이(李)교수의 업적이 탁월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미국서부의 솔트레이크(salt lake)에서, 교포사회를 이끌 만큼이나 외부에 명성을 알리며 선구자위치에 있어왔다. 중요한 것은 '아리랑'에 매료된 나머지 국내는 물론이고 시베리아 등지를 수차례 답사하며 '고려(高麗)유민 흔적'을 수집하는데 주력해온 점이다. 그래서 「아리랑 기행」을 출판하는 한편, 이를 토대로 「Arirang of Korea」라는 영문판 출판으로 국제사회에 한국을 알려왔다. 

이와 같은 '일념의 자세'를 보여 온데는 대학시절에 만났던 '제주출신교수'의 영향을 받은데 따른 것이었다. 이 때 만난 사람이 고권삼(高權三)교수이고, 이(李)교수는 강의를 듣는 대학생 신분이었다. 고(高)교수는 당시 동국대학교 소속이면서 서울대학교로 출강하고 있었다. 이것이 인연이 돼 당시 서울대학교에 재학하던 이 교수와 사제관계를 맺게 됐고, 강의내용에 감동한 나머지 오늘에 이르는 아리랑 기행으로 이어지게 됐다.

만남의 인연이 인생을 바꿔놓는 계기가 됐다. 고(高)교수는 광복직후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조선정치학사」를 출판할 정도로 남다른 업적을 보여 왔다. 제주도 출신만이 해낼 수 있는 근면성이 보여준 결과였다. 부지런하지 않고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高)교수는 '척박한 환경과 유배지'와의 상호관계에 대해서 정치학적 시각에서 관심을 보여왔다. 

이런 관심마저 '유배(流配)에 초점'을 맞춰왔음으로 출생지에서 연구주제를 찾아낸 것과 마찬가지다. 고향인 제주도가 갖는 유배지 내력과 함께 '아리랑어원(語源)의 진원지'임을 주창하게 된 근거도 여기에 있었다. 이것이 '아이롱(我耳聾)주의'이며, 그 속에는 "나는 들리지 않아서 모른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요즘 방식대로라면 '모르쇠로 일관하는 모습'이다. 

근본에서 영화를 누렸던 과거를 포기한 채 유배자 신세로 전락해서 살아가려는 '피세은둔(避世隱遁)적 생활방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귀머거리처럼 모르는 척하며 신분을 감추려는 위장술'과 일맥상통하고 있었다. 오늘날 아리랑이 유네스코에 등재될 정도로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면서 아리랑어원까지 밝혀지게 됐다. 주인공 위치에 있는 것이 고(高)교수였고 그 결과 중앙무대에서 업적을 재평가하고 있다.  

초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고향에서 출마해 정치이론을 현실에 적용하려고 시도했었다. 하지만 '고향과의 공간괴리'로 하여금 능력을 인정받는 기회조차 갖지를 못했다. 6·25동란에는 '남북으로 이어진 불운'까지 겹쳤지만, 세월이 지난 다음에야 당사자에 대한 업적을 평가하게 됐음으로 '만시지탄(晩時之歎)의 글귀'를 실감하게 만든다. 

거기에다 국제적으로 명성을 날리는 이(李)교수마저 고(高)교수가 남겨놓은 생전업적을 계승하는 위치에 서게 됐다. 인사유명(人死留名)의 글귀처럼 인재의 소중함을 떠올리게 만든다.

비록 몸은 갔어도 이름만은 그대로 남는 모습이다. 또한 자신에 그치지 않고 출신지인 제주도 명예까지 빛나게 됐음으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인재양성'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유사사례의 발굴과 더불어 인재양성에 주력해야 할 때임을 절감하게 만든다. 또한 위인들에 대한 발굴과 업적을 계승해나가는 동시에 후속세대들이 우선시 해야할 가치와 함께 당면과제가 무엇인지 떠올리며 인생설계를 해나갈 때인 것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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