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주 걸스로봇 대표, 논설위원

이번 출장은 열흘이 넘는 것이었다. 단말기에 SF 신간 몇 권을 다운받고, 가방에는 전설적인 페미니스트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자서전 「길 위의 인생」을 챙겨 넣었다. 그리고, 경유지인 샌프란시스코 공항 서점에서 화제의 잡지 「베너티 페어」 3월호를 샀다. 

마침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었다. 마침 엠마 왓슨의 '가슴'이 페미니즘계 안팎으로 이슈가 된 참이었다. 영화 '해리포터'의 헤르미온느 역으로 데뷔한 왓슨은, 20대가 된 지금 브라운대를 졸업한 엘리트로서, UN '히포쉬' 캠페인을 이끄는 신세대 페미니즘의 기수가 됐다. 그런 그가 잡지 「베너티 페어」에 가슴을 드러낸 화보를 실으면서 "진정한 페미니스트라면 몸을 상품화하지 말아야 한다"는 페미니즘 내부의 논쟁에 휘말린 것이다.

그 논쟁을 일언지하에 종식시킨 것이 바로 스타이넘이었다. "여자는 무엇이든 자기가 원하는 걸 입을 수 있다" 그는 욕설인 'f 워드'까지 사용해 불을 껐다. 알고 보니, 왓슨은 자신이 이끄는 페미니즘 북클럽의 첫 번째 책으로 「길 위의 인생」을 추천한 인연이 있었다. 스타이넘은 문제의 베너티 페어 인터뷰에서 왓슨의 다층적 면모를 칭찬했다. 둘은 60여년을 뛰어넘은 우정을 나누는 동지였던 것. 

여든이 된 스타이넘 역시 왓슨처럼, 미모, 젊음, 학벌(스미스여대 우등 졸업), 글재주, 언변과 같은 매력자본과 그로 인해 얻은 인기와 명성을 최대한 활용함으로써 페미니즘 운동을 대중화했다. 

머리를 히피처럼 풀어헤치고 미니 스커트 아래 다리를 드러낸 그는 '페미니스트 핀업 걸'이라 불리며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플레이보이 클럽에 '바니 걸'로 위장 취업해 남성중심 밤 문화의 속살을 고발했으며, 낙태를 지지하고 무수한 유명인사들과 염문을 뿌렸다. 그러다 예순을 넘겨 기존 입장을 수정하고 전격 결혼하면서, 페미니스트들로부터 비판받기도 했다. 

다른 모든 이념이나 운동과 마찬가지로 페미니즘 역시 완벽하거나 균질하지 않다. 각자의 처지나 인종, 종교, 신념 등에 따라 같은 사안을 두고도 의견이 갈린다. '한 손에는 바비, 다른 손에는 로봇'을 내세우는 필자는 굳이 말하자면 왓슨과 스타이넘의 편이다. 어떤 여성이 어떻게 생겼고, 무슨 옷을 입고, 어떤 화장을 하고, 누구와 만나, 어떻게 사는지는 그가 공부하고 일하는 데 전혀 중요하지 않다. 

지난 달 다녀온 전미과학진흥협회(AAAS)의 연례회의에서는, 「사이언스」와 같은 과학전문지 신규회원을 대상으로 메이크업과 프로필 촬영 서비스를 시도했다. 해당 부스는 개성 넘치는 과학자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지금 참석하고 있는 국제전기전자기술인협회(IEEE)의 ARSO 로봇학회에는 30여명의 참석자들 중 여성이 절반에 가까웠다. 짧은 고수머리를 수십 가닥으로 돌돌 말아올린 흑인여성과 긴 금발을 풀어헤친 백인여성, 장신구를 주렁주렁 단 인도여성 사이에, 입술을 분홍색으로 칠한 나도 있었다. 우리는 칼라풀했다. 

영화 '히든 피겨스'에 등장하는 NASA 최초의 흑인 여성 엔지니어들은, 손톱에 빨간 칠을 하고 뾰족구두를 신었다. 그래도 우주선 궤도를 잘만 계산하더라. 패션지 「보그」는 개봉 시기에 맞춰 NASA에 근무하는 현역 여성 엔지니어의 인터뷰를 실었다. 그러니 한 손에는 '사이언스', 다른 손에는 '보그'인 셈.

스타이넘의 말대로 "길은 우리를 부정에서 현실로, 이론에서 실천으로, 주의에서 행동으로, 통계에서 이야기로 인도한다" 세상의 여자들은 저마다 다른 인생을 살고, 나는 길 위에서 그 여성들을 만나 매일 깨달아간다. 

페미니스트를 표방하지 않는 여성조차도 페미니즘의 일부다. 누구나 생긴 모양 그대로 존재하며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이 운동의 지향이다. 페미니즘이 민주주의를 완성할 것이라는 슬로건은 옳다. 결국은 다양성이 세상을 구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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