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만익 탐라문화연구원 특별연구원·논설위원

1960년대까지만 해도 2~3월이면 중산간 마을공동목장지대에서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것은 소를 길렀던 목축민들이 행했던 '방애'의 풍경이었다. '방애'는 방화(放火)를 의미하는 것으로, 일제강점기에는 '화입'(火入)이라고 불렸다. 

'방애' 또는 '방앳불' 놓기는 최근 새별오름을 무대로 열렸던 들불축제의 원형에 해당한다. 제주의 대표축제로 자리매김을 해온 들불축제는 '방애'라는 제주의 옛 목축문화를 현대적 감각에 맞게 재현해 관광 상품화한 문화관광축제다.

'방애'는 처음에는 농경지나 방목지 확보를 위해 이뤄졌다. '방애'의 전통은 원간섭기에 몽골이 제주지역의 동서부에 '탐라목장'을 설치하면서 시작됐다는 주장이 있다. 즉, 몽골의 고산초원에서처럼 말들이 달릴 수 있게 탐라에 들어왔던 몽골의 목축민들이 산림지대에 불을 놓은 결과, 초지대가 출현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세종실록」(1434년 6월)에 등장한 고득종(高得宗) 관련 내용에는 '방애'를 짐작할 수 있는 구절이 있어 주목된다. 그는 세종임금에게 "사람들이 불을 놓아 밭을 갈기 때문에산에 풀과 나무가 없어 말이 번식하기 힘들다"고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마을공동목장이 조성되면서 '방애'는 공동목장 관리 차원에서 이뤄졌다. 공동목장 단위에서 목축을 위한 '방애'는 말보다는 소 방목을 위한 행사였던 것이 특징이다. 소에 비해 말들은 공동목장이나 들판에 연중 방목돼 이른 봄철에도 마른 풀을 먹어야 했기 때문에 방앳불 놓기는 말들이 먹을 풀들을 태우는 결과를 초래해버렸다.

공동목장에서 '방애'는 대체로 2월부터 3월 초순경 새 풀이 돋아나기 전에 진행됐다. '방애'를 통해 잡초나 가시덤불, 각종 해충을 제거할 수 있어 새롭게 목초지를 만들거나 공동목장을 재정비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방애'는 출역(出役)으로 이뤄졌다. 이것은 공동목장에 소를 올릴 축주는 물론이고 소를 가지지 못한 주민들도 참여했던 마을 공동체적 행사였다. 소는 밭갈이에 필수적인 가축이었기 때문에 소를 키우지 못하는 주민들도 농사철 소를 빌리기 위해서 '방애'에 참여하는 성의를 보였다. 그러나 집안사정으로 '방애' 참여가 어려울 경우, 자신을 대신할 사람을 보내거나 일정 금액의 '궐금'을 내야 했다. 

애월읍 상가리에서는 '방애' 놓기에 적당한 날을 정하고 '방애' 놓기에 필요한 인원을 동원해 배치할 계획을 세운 다음, 바람방향과 그 변화 가능성을 잘 가늠해 불을 놓았다. 

유수암리에서는 소를 올리기 전에 건조하고 바람이 없는 날을 골라 풍향을 살피고, 바람이 불어오는 반대편 끝에 수 미터의 방화선을 구축한 다음, 조합원들을 동원해 불 놓기를 했다. 공동목장에 불 놓기는 과거와는 다르게 현재도 일부 변형돼 행해지고 있다. 서귀포시 하원동에서는 봄철 한가한 때를 골라 시청의 허락을 받은 다음, 소방서의 차를 공동목장에 대기시켜 불 놓기를 했다. 

'방애'를 자주하면 초지생태계에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그래서 공동목장 내 초지를 지속적으로 유지, 활용하기 위해 마을공동목장조합 규약에 '방앳불' 놓기를 제한하는 규정을 만들어 조합원들에게 준수하도록 했다.  

'방애'는 1970년 한라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산림보호를 위해 금지됐다. 오늘날 여름철 진드기로 인해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 것은 '방애'를 금지한 영향으로 보인다. 현재 '방애'는 들불축제로 변형돼 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 전통적 방식에 의한 목축이 중단되면서 중산간 마을공동목장지대를 빙 돌아가면서 행해졌던 '방앳불 놓기'라는 목축문화가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다. 앞으로 '방애'라는 목축문화를 복원하고 계승해 마을공동체를 회복하는 계기로 활용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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