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휴 전 초등학교 교장·논설위원

삼성동 사저로 들어가는 박근혜 전 대통령. 애써 웃음 짓는 눈에 눈물이 찰랑거렸다. 하지만 민경욱 전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서 발표한 메시지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는다." 본인이 직접 발표하고 질문에도 대답했으면 좀 좋았을까. 며칠째 사저 앞 골목길에 나와서 시위를 벌이는 지지자들에게도 "뜻은 고맙지만 이제 그만 돌아가 줬으면 좋겠다"는 한 마디를 왜 못해주는가. 마음속으로 헌재의 판결을 승복하지는 못하더라도 이제는 평범한 시민의 한 사람임을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탄핵을 외치던 '촛불' 쪽에서는 치킨과 맥주에 샴페인과 폭죽을 터뜨리며 자축했다니 나라에 경사(慶事)라도 났는가. 전쟁에 이긴 점령군 같다. 너무한 거 아닌가.

지난 13일에는, 김대중·노무현 령부의 외교·안보분야 고위직 출신들로 주축을 이룬 '한반도평화포럼'이 "탄핵은 정부가 추진해온 모든 정책의 탄핵을 의미한다"며, 현 정부에 대해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말라, 부역하지 말라"고 요구했단다. '조폭' 수준에 가깝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성이 차지 않아 나라를 결딴내려는 것인가.

대선 예비후보들이 넘치고 있다. 귀에 솔깃한 말을 앞세우지만, 나라를 이끌 진정한 지도자인지는 냉정히 판단해야 한다. 국가경영의 비전이나 그걸 이룩할 수 있는 구체적 계획은 있는지, 분열된 국민의 가슴을 하나로 모을 통합리더십은 가지고 있는지를.

1987년 개정된 헌법이 현실에 맞지 않으니 대선 때 함께 개정하자는데, 몇몇 예비후보는 대선 후로 미루자고 한다. 이유인즉 "국민들 합의가 필요하다"는 것. 이들은 혹시 국회가 국민의 의견을 모아 국정을 논의하고 의결하는 곳이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것인가. 하기는 국회가 하도 일을 하지 않다보니 국회의 기능 자체를 잊어버릴 수도 있겠지.

나라의 앞길이 잘 보이지 않는다. '사드보복'을 부추기는 쫀쫀한 중국정부, 북한의 핵위협,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교과서에 버젓이 적어놓은 아베의 일본, 트럼프의 폐쇄적 보호무역주의. 그 뿐이랴. 안으로는 사분오열된 국론과 경기침체로 국민의 불평불만이 하늘을 찌른다. 산적한 의제는 뒤로 미뤄둔 채 국정동반자로서의 역할도 망각하고 싸움에 몰입하는 국회의원들, 세계에서 가장 경직된 노동시장의 '힘센 귀족노조'들, 건수만 생기면 달려들어 갈등을 고조시키는 시위꾼들….

답답한 머리를 식히려고 집을 나선다. 늘 걷는 산책로 옆에 목련꽃이 활짝 피었다. 하얀 꽃잎이 곱다. 가까이 다가가서 꽃잎을 만져본다. 두툼하지만 부드럽다. 향기가 은근하고 짙다. 목련은 공룡시대부터 지구상에 나타나 1억4천만 년을 살아온 식물이다. 당시에는 벌 나비가 없었기에 딱정벌레가 대신 수분(授粉)을 했단다. 그래서인가. 하얀 꽃잎에 싸인 암술과 수술은 크고 단단해 보인다. 딱정벌레가 헤집고 다녀도 망가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단단하게 만든 것이다. 우리도 이제 나와 나라를 위해서 모두들 단단해져야겠다.

우리는 또한 힘을 하나로 뭉치는 국민이 돼야 한다. "한 집에서 여러 마리의 진돗개를 키우면 한번은 꼭 싸운다. 싸움에 져도 승복하지 않는다. 저마다 우두머리가 되려고 한다. 하지만 공동의 목표가 생기면 한데 뭉친다. 멧돼지사냥을 함께 하게 되면 친해져서 사이좋게 지낸다. 한국인들도 공동의 적, 공동의 목표가 있을 때는 단결한다. 한강의 기적이 그런 경우다." 한국관광공사 사장을 지낸 독일계 한국인 이참 씨의 말이다.

다투는 것은 이제 그만하고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때다. 그 누구도 우리를 윽박지르지 못하게 힘을 키워야 한다. 단단한 꽃술을 갖추고 공룡시대를 살아나온 목련꽃처럼. '제2의 도약 한국'을 위해 국민의 역량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 하나의 사냥감을 향해서 함께 돌진하는 진돗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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