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연구소장·논설위원

농부였다. 가족들을 남겨두고 돈 벌러 일본으로 떠났던 그 아버지는 해방 후 돌아왔다. 귀향 후 불과 몇 개월. 가족과의 다정한 삶을 꿈꾸던 가장의 꿈은 관덕정 광장의 미친 기관발사로 한순간에 날아갔다. 

아버지 송덕윤(이명 송덕수, 당시 47세). 1947년 3월1일. 같은 기념식에 갔던 12살 초등학생 아들은 총소리에 달려갔다. 도립병원에 실려간 아버지의 살려달라 애원하던 마지막 순간을 잊을 수 없다.

3남1녀를 남겨두고 떠난 아버지 대신 생존을 껴안은 어머니의 고통은 말이 필요없다. "산 사람은 살아야하니까, 풀죽이라도 쒀야하니까" 처음으로 아버지 이름을 꺼내는 80대 아들(송영호)은 어머니의 그날 이후가 겹쳐지자 목이 멘다. 어렸지만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다고. 억울한 죽음들을 위한 표지석 하나 따로 있어 기억해야 할 것 아니냐고 할 때는 단호했다. 지난 3월31일 제주4·3연구소가 마련한 열여섯번 째 증언본풀이에서였다. 그렇게 4·3의 도화선이 된 3·1의 기억들을 70년 만에 불러낸 자리였다. 4·3의 구술사는 계속된다.

그 해 그 날 같은 시각, 3·1기념식에 갔다가 경찰의 발포로 희생된 다른 사람. 이 댁의 아버지 오영수(이명 오문수. 당시 34세)도 해방 후 일본에서 돌아왔다. 가족과 함께였다. 헌데 아버지만 다시 볼일 보러 일본 갔다 돌아온 바로 다음날이었다. 

하룻새 아버지가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온 것은 반장 할아버지 권유로 따라간 후였다. 그 날 이후 어머니는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시거나 문만 바라보셨다. 당시 열살 소녀였던 딸의 눈에 비친 어머니였다. 팔순이 돼 어렵게 서울에서 온 그녀(오추자)의 증언이다. 간신히 아버지를 불러내던 딸의 목소리, 처음엔 낭랑했으나 끝내 터지는 눈물을 막진 못했다. 4월1일 제주민예총이 마련한 찾아가는 4·3현장 위령제 해원상생굿 증언자리였다. 기록되지 못한 역사는 살아남은 자의 구술로 이렇게 기억되고, 기록되고, 역사가 된다. 살아남은 이들의 트라우마는 이어진다.

그토록 설레야할 해방된 조국의 시작점이었던 3·1기념식. 관람관중을 향한 3·1의 죽음은 4·3시작이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15살 소년의 죽음부터 아이업은 여인까지. 그 이름들, 김태진, 박재옥, 송덕윤, 양무봉, 오영수, 허두용. 70년 만에 관덕정 마당엔 이들 6인의 신위가 올려졌다. 광장은 슬프지만 날은 찬란해서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부디 이제는 잘 떠나시길 빌고 비는 심방의 사설이 처연했다. 노란 슬픔, 세월호 아이들까지 품어 꽃길을 해원했다. 

또다시 맞는다. 4·3 국가추념일. 예순 아홉 해의 아침. 생물학적으론 60대의 끝자락. 국가 폭력에 희생된 사람들이 눈물도 내지 못했다. 아프다 못했다. 가슴이 미어져도. "두루 설뤄사 눈물 난다"고, 그렇게 죽었고, 그렇게 고령이다. 

지금, 내년 70년. 4·3은 여기까지 왔으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해 풀어야 할 본질적인 '정명'의 문제, 유족 배보상문제 등 첩첩 과제를 넘어야 한다. 이젠 국가가 반드시 답해야 할 때다. 대선 정국의 정치권이 답해야 할 때다. 마침 제주4·3연구소 증언본풀이에 참석한 정세균 국회의장도 "과거사 청산 없이 미래가 없다"며 4·3 해결에 적극 나설 것을 약속했다. 

제주에서 세계로 가야하는 지점. 8일 4·3범국민위원회가 서울에서 출범식을 갖는다. 

그러니 이 아침, 가혹하게 어여쁘다. 노랑 분홍 봄꽃들. 저들도 저절로 피어나지 않았다. 

4·3도 저절로 피어나지 않았다. 그러니 늙은 유족들이 젊은 자손들과 함께 4·3평화공원 제단 아래 들었다. 꽃술 한잔씩 바친다. 부디, 이젠 화사한 봄, 봄이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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