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식 제주발전연구원·제주학연구센터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98주년 기념일 아침이다. 2년 뒤면 100주년을 맞이한다. 오늘 문득 '대한민국'이란 이름을 되새겨본다.

가끔 역사 강의 중에 청중들에게 묻는 질문이다. "대한민국 국호의 유래와 의미를 아십니까" "대한제국도 한국이고 대한민국도 한국인데,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국민적 상식일 것 같은데, 막상 들어보면 그렇지도 않다.

1910년대 우리 민족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민족운동가들의 독립국가에 대한 구상은 이전 왕의 나라를 회복하자는 복벽주의와 국민의 나라를 새로이 만들자는 공화주의로 크게 갈라졌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공화주의로 기울어졌다.

망국의 한을 품은 지 9년 만에 터져 나온 1919년 3·1운동의 만세 함성은 국민의 나라에 대한 열망의 표출로 받아들여졌다. 3·1운동을 계기로 민족 해방과 독립국가 건설에 대한 의지를 하나로 결집해서 항일투쟁을 수행하고 지휘해 나갈 정부수립 계획이 국내·외에서 진행됐다. 그 결과 1919년 4월13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념·지역 등으로 갈라진 독립운동의 역량을 집중시켜서 공화민국을 건설할 토대가 마련됐음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현행 대한민국 헌법 서문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내용이 명기돼 있다. 그런데 최근 건국절 논란이 불거져 나오고 있어서 국민들을 혼란시키고 있다. 역사학자 대부분은 1919년 4월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대한민국이 세워졌다고 하지만, 일부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은 남한 단독정부가 들어선 1948년 8월15일에 대한민국이 건국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1948년 건국절 주장이 불거져 나왔고, 최근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과정에서도 이 문제가 대두된 바 있다.

건국 시기에 대한 논쟁은 현재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을 따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만약 1948년 8월 15일 건국됐다고 하면,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나 일제에 저항해서 싸운 민족운동의 역사는 무의미해져 버린다. 또한 우리 헌법과 역사 해석을 스스로 부정함으로써 역사적 정당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1948년 7월17일 제정된 이승만 정부의 제헌헌법에는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해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해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라고 해, 1919년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이 건립됐으며, 1948년 8월15일 정부 수립은 국가의 재건이라고 했다. 심지어 이승만 대통령은 1956년 대선 때 홍보 전단을 만들면서 자신의 이력에 대해 "기미년(1919년) 3월1일부터 기산(起算)해 29년 만에 자주 민국을 부활했다"고 명시해 임시정부 부활을 자신의 업적으로 강조했다. 이승만은 건국하자고 한 일이 없었는데, 이승만을 건국의 주역으로 부각하려는 것은 오히려 이승만의 역사의식을 왜곡하는 것이라는 전문학자의 지적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에 백범 김구 선생이 기억되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파수꾼이던 김구 주석이 해방 직전에 국내진공작전을 시도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1945년 봄 주석 경호실장이던 제주도 한림 출신 문덕홍을 국내에 비밀공작원으로 특파해 제주도로 진공하기 위한 사전 작업에 나선 사실은 최근에야 알려졌다. 김구는 "미군이 제주도로 진공해 해방시키면 임시정부도 제주도에 들어가 전국의 한인을 지휘해 미군의 한국 해방 작전을 돕겠다"는 제주도 진공 계획을 추진했으나, 8월15일 일제가 항복함으로써 무산됐다. 제주 출신 항일운동가 문덕홍과 백범 선생을 통해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하는 4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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