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승남 사회부차장 대우

1970년 12월15일 제주-부산항로 정기여객선 남영호가 침몰했다. 14일 서귀포항에서 승객 210명과 연말 성수기용 감귤을 싣고 출항한 남영호는 성산항에서 승객 121명과 추가 화물을 싣고 밤 8시10분께 부산으로 출항했다. 당시 남영호의 승선 정원은 290명이었으나 승객 311명과 선원 20명 등 331명을 태워 정원을 41명이나 초과했고, 화물 400t 이상을 무리하게 실은 것으로 밝혀졌다. 게다가 당국은 남영호가 침몰하며 보낸 조난신호를 어선 조난사고로 오인했고, 결국 이 사고로 319명이 목숨을 잃었다. 승객 중 64명은 승객 명부에도 없었다.

1993년 10월10일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에서 여객선 서해훼리호가 침몰했다. 희생자 대부분은 주말을 이용해 바다낚시를 즐기러 간 낚시꾼들로, 구명조끼 등 안전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아 피해가 컸다. 292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출항하면 안 되는 날씨에 무리한 운항을 감행한 서해훼리호는 탑승 정원(221명)을 141명이나 초과한 362명이 승선했으며, 4척이던 구명정 중 실제로 작동한 것은 한척이다. 갑판장이 휴가 중인 항해사의 업무를 대신했다.

2014년 4월15일 인천 연안여객터미널을 출발, 제주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청해진해운 소속)가 4월16일 전라남도 진도군 병풍도 앞 인근 해상에서 침몰했다. 탑승객 476명 가운데 172명만이 생존했고, 300명이 넘는 사망·실종자가 발생했다. 세월호에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난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이 탑승해 특히 어린 학생들의 희생이 많았다. 그들 가운데 실종자 9명이 1000일이 훌쩍 넘어간 지금까지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과적과 초과승선, 정부의 늦장대응, 안전 불감증 등이 부른 인재(人災)들이었다.

세월호가 침몰 1091일만인 지난 11일 전남 목포신항 절재부두에 거치됐다. 미수습자 9명을 찾고 침몰원인 등을 규명하기 위한 작업도 본격화되고 있다. 어제(16일)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3년째 되는 날이었다. 거듭되는 인재에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면 큰 문제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제대로 규명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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