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대한민국 국회를 규탄하고 나섰다.'제주4·3 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 특별법을 통과시켰다고 해서다.군경과 양민을 죽인 폭도들의 명예를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국회가 회복시켜 준다는 것이 말이나 되느냐는 항변이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는 모르는 일이나,국내 유력지라고 자처하고 있는 모 종합월간지가 이것을 대서특필했다. '국군을 배신한 대한민국 국회'란 선정적인 타이틀을 달고 서였다.도데체 4·3특별법이 뭐가 잘못 됐길래 자유민주주의를 들먹이고, 아홉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대한민국 국회를 배신자라고 까지 지탄하고 있는가.

 "국회 규탄의 논지는 이랬다.한마디로 대한민국 국회가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했다.4·3으로 희생된 사람들이 곧 나무라고 하면,숲은 곧 공산폭동이다.숲을 정돈하는 과정에서 나무가 다친 것 아니냐.양민 희생이 있었다고 하나 이유없는 학살극은 없다.희생자 모두가 양민은 아니지 않느냐...바이마르 헌법의 방심 속에서 나치 독재가 싹텄다.자유민주주의는 피 흘려 목숨걸고 지키는 곳에서 열매 맺는다.그 과정에서의 희생은 당연하다…."

 제주4·3을 나무와 숲에 비교함이 그럴 듯 하다.하지만 숲과 나무의 논리는 시각에 따라 명암이 다르다.어제의 권력은 숲의 정돈을 구실로,숲속 나무를 마구잡이로 베어 냈다.그중의 십중팔구는 국가공권력의 총칼아래 희생됐다.절대다수가 양민들이었다.4·3의 배후에 있었던 미국도 인정하는 바다.결코 숲속 나무 몇 개 다친 그런 작은 일은 아니었다.

 이유없는 학살이 있었겠냐고 반문하고 있다.그러나 양민학살에 정당한 이유가 있을 수 없다.비무장 양민들을,그것도 가족단위로 마을단위로 하루같이 몰아 세워 집단학살해야 할 이유와 근거는 대명천지 그 어데에도 없다.전쟁의 와중에는 억울한 희생자가 있게 마련 아니냐고 하고 있다.하지만 4·3이 전쟁상황은 아니었다.설령 전시라고 해도 무차별 대량 학살은 결코 용납이 안된다.

 자유민주주의가 피와 땀을 요구한다는 얘기 또한 구차스럽다.본시 자유민주주의가 피를 요구한다 함은 약자의 강자대항 논리다.강자가 약자를 제압하기 위한 논리는 아니다.부르조아계급이 귀족과 왕권에,시민계급이 막강한 권력에 대항하여 피를 흘리는 시민혁명에서 비롯되는 논리다.부당한 공권력의 집행이나 쿠데타 등의 논리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나치 히틀러의 군화발에 짓밟힌 바이마르 헌법.그러나 일시적이었다.나치통치는 사라졌지만 바이마르 헌법정신은 오늘날 세계각국의 헌법속에 건재해 있다.

 피흘려 수호해야 할 진정한 자유민주주의는 자유 평등 박애,평화와 행복을 지고의 가치로 하고 있다.그 가치는 반드시 존중되야 한다.그러나 반세기전 이땅에서 지고지순의 가치가 존중되지 못했다.수만명의 섬사람들이 무고하게 죽어 나갔고,백만이 넘는 도민들이 아직도 그것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다.그리고 그러한 죽음과 고통은 불법적이고 초법적인 계엄령이 단초였다.

 프랑스의 양심 에밀 졸라는 진실이 거짓으로,거짓이 진실로 둔갑한 뒤레퓌스 군사재판을 두고 이렇게 질타했다.
 “진실이 행군하고 있으니 아무도 그길을 막을 수는 없다.진실이 지하에 묻히면 그 진실이 자라난다.그리고 무서운 폭발력을 축적한다.이것이 폭발하는 날에는 세상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릴 수도 있다 ”

 그렇다. 4·3은 그 진실이 지하에 묻혀 자라고 있는 폭발물이었다.그리고 4·3 특별법은 그 폭발물에서 뇌관을 제거하는 작업의 하나에 다름아니다.과거의 잘못을 아우르기 위한 오늘의 작업을 두고,'국군을 배신'했다는 말이 가당한 얘기인가. '특별법과 백만도민에 대한 모독이자 시대착오적 선동이 아닐 수 없다. <고홍철·논설위원><<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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