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주 걸스로봇 대표, 논설위원

'까톡!' 오전 8시50분 알람이 뜬다. "진주님, 회의 오세요" 요즘 프로젝트를 함께 하는 학생이다. 회의실은 또다른 온라인 협업도구인 '슬랙'이다. IT 스타트업계에서 많이들 쓴다. 카톡에서 흘러가버리는 얘기들을 주제별로 저장하고 공유하는 데 쓸모가 있다. 나의 슬랙 앱에 저장된 단체는 두 곳. '장고걸스'라는 여성 프로그래머 커뮤니티와 '페미회로'라는 이공계 대학생 페미니스트 단체다. 모두 과학기술계의 여성과 관련돼 있다. 오늘은 페미회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페미회로는 국내 5개 지역거점 과학기술중점대학(DGIST, GIST, KAIST, POSTECH, UNIST)에서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친구들이 모인 연대체다. 수학, 물리학 같은 자연과학부터 생명공학, 화학공학, 기계공학까지 다양한 분야의 학생들이 모였다. 지난 3월 모집한 1기 회원은 30여명. 창립회원들의 열의가 대단하다. 모두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인 카카오톡이나 페이스북은 기본. 프로젝트 팀마다 다른 협업도구를 선택해 슬랙 외에도 '아사나'와 '트렐로'까지 두루 경험하고 있다. 요즘 실험하는 건 '잔디'라는 국산도구다. 게다가 '구글 행아웃'으로 하는 화상회의도 있다. 

멤버들이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트위터와 인스타그램과 블로그마저 더하면 거의 모든 온라인 미디어와 협업도구를 쓰고 있는 셈이다. 밤낮없이 울려대는 알람들을 잠시만 소홀히 하면, 메시지 수백 개가 쌓인다. 이 젊은 친구들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이 이렇게나 많았다는 걸 새삼 느낀다. 

이들과 소통해온 석 달 동안, 내가 '꼰대'라는 걸, 바야흐로 꼰대가 돼 버렸다는 걸 알았다.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그랬다. 머리를 걸그룹처럼 기르고,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일 년에 몇 번은 피부과에 다니며 젊어 보이려고 애쓰지만, 밥 한 끼 굶으면 급격히 당이 떨어지고, 밤샘 한 번 하고 나면 다음날 하루가 온통 마비된다. 그리고 커피를 마시면 심장이 뛴다. 이럴 수가, 하루에 서너 잔은 거뜬했는데. 신체적인 쇠락보다 충격적인 건 정신적인 노화였다. 

이 친구들과 과학기술에서의 젠더혁신을 다루는 '젠더서밋'이라는 해외학회를 가려고, 크라우드 펀딩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돌아가며 글을 쓰게 됐다. 친구들이 필자가 쓸 주제와 쓰는 과정을 궁금해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건 협업이니까. 그런데 순간적으로 울컥했다. "나, 글쟁이인데? 그래도 몇 년 기자 생활하면서 공식적으로 글밥 먹고 살았는데, 책도 몇 권 낸 사람인데, 그러니까 프로인데, 왜 내 글을 검열하겠다는 거지?"

내부 마감을 몇 시간 어기고 '구글 드라이브'에 초안을 올렸다. 내게는 '구글 닥스'로 문서를 공유하는 데 알러지가 있다. 기능이 손에 붙지 않은 시절, 이미 한 번 큰 프로젝트를 날려먹은 경험이 있었고 그 체험은 거의 트라우마가 됐다. 몇 권의 책과 문서들을 만드는 동안, 아무리 불편해도 한글이나 워드 파일을 썼다. 초안1, 초안2, 수정1, 수정2, 최종. 인터넷 농담처럼 원고마다 수식어가 붙었다.

초안에 주르르 코멘트가 달렸다. "주제가 너무 넓어요" "이 표현은 저렇게 바꾸는 게 어떨까요" "사진은 무엇을 쓰면 좋겠어요" 약간의 반발심을 안고 밤을 새우다, 문득 두 가지를 깨달았다. 아, 나는 꼰대구나. 그리고 '우리' 글이 더 좋구나.

갓 스무 살 대학 신입생일 때 처음 이메일 계정을 만들었다. 지금은 사라진 '다음' 한메일이었다. '뚜우, 뚜우' 전화기에 연결된 모뎀으로 PC통신에 접속해 '영퀴방' 따위를 들락거렸다. 나이 마흔에, 온갖 도구를 쓰는 스무 살 어린 친구들과 일하며, 필자는 매일 반성한다. 워드, 엑셀, 파워포인트를 못 만져서 신입사원에게 부탁한다는 '민폐' 김부장이 먼 얘기가 아니었다. 나이들수록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더니. 지갑을 열어 페이스북 홍보를 돌리고 거울을 봤다. 내 걸그룹 스타일의 긴 머리에 흰 머리 두 가닥이 있었다. 아주 긴, 흰 머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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