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준 제주대 건축학부 교수·논설위원

「건축가 없는 건축」은 체코 태생의 미국 건축가 베르나르 루도프스키의 책 제목이다. 1964년 발간된 이 책은 뉴욕에서 큰 호평을 받았고, 이후 건축가들이 지역 건축과 지역성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이 책의 구성도 특이한데, 글 대신 세계 각지의 원주민들이 지은 토착적인 건축 사진만 가득하다. 더 재미있는 것은 책 제목에 달린 부제다. 루도프스키가 붙인 건축가 없는 건축의 부제는 '족보 없는 건축'이다. 

이 책에 있는 토착 건축 사진들은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책 제목 그대로인 '건축가 없는 건축: 족보 없는 건축'으로 전시됐고, 당시 뉴욕 시민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이끌어냈다. 세계 최고의 도시를 자부하는 뉴욕에서 족보 없는 건축이 호응 받았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지만, 이 아이러니를 조금 더 생각해보면, 현대도시에서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를 돌아보자. 과연 무엇이 보이는가. 제주가 국제자유도시라는 멋진 슬로건을 내걸고 만들고 있는 도시의 모습은 어떤가. 뉴욕처럼 마천루가 가득한 도시를 꿈꾸는 건가 아니면 고풍스런 유럽의 도시를 꿈꾸는 건가. 이런 질문에 그 누구도 여태껏 시원한 답을 한 사람이 없는 것도 안타깝지만, 고민도 없는 이 현실은 슬프기만 하다. 도시재생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정부가 매해 100곳을 골라 10조원을 도시재생으로 투입한다고 하는데, 제주가 만들려는 도시재생의 그림은 무엇인지, 그 꿈의 완성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역사와 문화가 공존하는 도시재생을 말하지만, 관덕정 광장 복원이나 제주성 복원에 매몰돼 큰 그림은 보이질 않는다.

먼저 우리를 둘러싼 도시의 민낯을 보자. 제주시나 서귀포시의 도심은 우리나라 어느 도시에나 있는 콘크리트 건물들로 둘러싸여 있다. 제주는 다르다고 말하고 싶겠지만, 눈에 보이는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문제는 이러한 현실을 굳이 극복하기 위해 억지 일을 벌인다는 점이다. 제주가 그려야할 도시의 모습은 마천루 가득한 도시도, 유럽 같은 도시도 아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 두고, 지역 주민이 원하는 대로 두는 것이 미래의 경쟁력을 가진 도시를 만드는 길이다. 서울대 김광현 교수의 말대로 '도시적 풍경의 배경이 되어 거주와 공간, 내부와 외부, 공간의 배열에 대한 전형적 방식이 바뀌기를 요구하는 것은 이른바 작가 건축가의 작품이 아니라, 이런 B급, C급 건물들이다. B급 건축물을 통해 생각한다면 도시에 대한 접근 방식이 크게 달라질 것이다' 그렇다. 우리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B급 건축물들을 부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현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새로운 도시의 풍경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열 수 있다. 

건축과 도시에는 복잡하고 다양한 인간의 욕망이 겹쳐있다. 꿈도 있지만 채무도 있고, 가족의 희망과 힘든 생존의 삶도 담고 있는 것이 건축물이다. 이런 욕망의 건축물들이 모여 있는 것이 도시인 것이다. 그리고 이 건축물을 만들어내는 것은 작가주의 건축가가 아니라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베르나르 루도프스키가 그의 책에서 강조한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사람들, 즉 그 건축물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건축가 없는 건축의 주인공은 바로 사람이며, 현대도시에서 진정 중요한 것도 그 곳에 사는 사람이다. 

도시를 망치는 것은 B급 건축물들이 아니라, 전문성을 앞세워 밀어붙이는 관료들과 전문가들이다. 제주 원도심 재생에서 관덕정 광장 복원이나 제주성 복원은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 이유는 뻔하다. 힘들지만 오늘 하루를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장소가 아니라 전문가의 꿈같은 유토피아를 만들려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없다면 있는 그대로 두고, 건축가 없는 건축의 주인공인 지역 주민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이 새로운 도시의 풍경을 만드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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