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창원 제주대학교 사학과 교수·논설위원

중국 문명의 토대가 됐던 황하(黃河)는 원래 함유하고 있는 모래와 진흙의 양이 매우 많다. 자연히 침적되는 토사로 인해 강의 물길이 남북으로 변동되기 쉬운 성질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매년 수량의 변동 또한 매우 커서 수량이 증가하는 기간에는 그 양이 평상시의 수십 배에 달하기에 범람의 가능성이 도처에 존재한다. 

황하는 이러한 자연적 조건으로 인해 제방의 수축을 비롯한 각종 치수사업의 필요성이 항시 존재했다. 특히 제방의 적절한 수축과 보수가 이뤄지지 않으면 강기슭에 거주하는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에 대한 위해성이 지극히 높아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같은 이유로 영양(滎陽)에서 동쪽 천승(千乘)의 바다 입구까지 1000여 리에 이르는 대제방(大堤防)을 수축하는 사업은 역대 왕조가 중시했던 황하 치수사업의 일환이었다.

후한(後漢)시기 인물이었던 왕경(王景)은 학식이 뛰어나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했고 많은 책을 읽었다. 특히 천문과 수학에 관련된 일을 좋아했고 기예가 매우 많았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는 특히 물의 성질을 잘 이해했는데, 일찍이 왕오(王吳)라는 인물과 합작으로 언류법(구조물로 물길을 막는 치수의 한 방식)을 이용해 의거의 준설을 성공적으로 마친 일이 있었다. 

왕경은 특히 황하의 치수와 관련된 이해득실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기에, 후한의 제2대 황제였던 명제를 접견하고 황제가 그에게 치하의 문제에 관해 질문했을 때 막힘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영평 12년(기원후 69년) 황제는 왕경을 파견해 황하를 안정시키는 수리사업을 관장하도록 했다. 

후한서(後漢書)의 기록을 통해 당시 왕경이 주관했던 수리사업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물길을 수리하고 제방을 쌓도록 하니, 영양으로부터 동쪽의 천승 바다 입구까지 1000여 리였다는 기록이 보여주는 것은 황하대제방의 축조를 지칭했던 것으로 거대한 제방을 축조하는 공정은 예나 지금이나 국가의 역량이 아니고서는 시행될 수 없는 대규모의 토목사업이었다. 이 치수사업에서는 리거(理渠)라는 물길을 정비하는 사업도 행해졌다. 황하의 홍수에 의해 막혀서 만들어진 변거(卞渠)부근의 도랑과 골짜기에 새로운 인수구(引水口)를 개착하고, 제방을 보강해 수재의 위험을 예방하는 성격의 공정이었다. 그리고 퇴적물이 쌓여 물길의 흐름이 원활하지 못한 물길의 상류구간에 준설을 통해 물길을 트이게 했다. 제방수축과 물길의 준설이 이뤄지고 난 후에는 십리마다 수문을 하나씩 세웠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 구조물의 설치목적은 바로 황하와 변하를 나눠 흐르게 하고 그 옛 물길을 회복시키는 것이었다. 

왕경이 수문을 세운 것은 황하의 물길이 나눠지는 자연적 형세에 다시 인공적인 정비와 보수를 더한 것으로 기존 자연조건에 대한 개선을 통해 그 사용자에게 유리하도록 환경을 바꾸는 작업이었다. 이러한 점은 대다수 토목사업의 목적이기도 하다. 왕경이 비록 그 경비와 노역을 절감했다고 했으나 100억을 헤아렸다는 기사에 의하면 공정의 규모가 거대했기 때문에 투입된 경비 또한 상당히 컸음을 알 수 있다. 

현대국가에 있어서 국가적 규모의 공공건설을 결정할 때 수많은 반대에 부딪히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그 비용에 대한 기대에 긍정적인 부분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 이명박 정부 시절에 이뤄졌던 4대강 사업의 목적도 위에서 언급한 왕경의 치하목적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2000년 전 인물이었던 왕경은 옛 물길을 회복시키고자 대규모 토목사업을 일으켰고 결과 또한 그와 같았다. 그런데 지난 정권의 4대강 사업은 도리어 옛 물길을 망가뜨린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겉으로 지향하는 바는 같았으나 그 결과는 판이하게 달랐으니 그 원인이 단지 시행한 사람이 달랐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혹여 다른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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